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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Mar 19. 2023

다시 여기에

친구들의 기도에 감사하며


3주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엄마의 대퇴부 골절상과 응급실 방문. 엄마는 연세도 있고 걷지 못하는 상태라서 전신 마취하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돌아온, 요양원. 골절 부위의 통증이 많이 클 텐데… 그것조차 표현을 못하시는 엄마의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나의 판단에 엄마만 더 고통스럽게 해 드리는 것은 아닌지? 좌불안석의 상태로 일주일쯤 지났고, 그런대로 안정된 상태라는 생각이 들 무렵, 토요일. 응급 상황이 발생했다. 마침 그땐 혼자였다. 절친은 서울에 가 있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두려웠고 허둥댔다. 누구라도 옆에 있었다면 그렇게 급하게 외사촌을 오라고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그리 급하게 남편에게 울고 불고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늘 생각했던 ‘마음의 준비’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거렸다. 일단 엄마가 다니시던 성당에 연락을 하여 ‘병자성사’를 받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본당 신부님과 연락이 되었고, 신부님은 기꺼이 와 주시겠다고 했다. 신부님을 모시러 가며 자리를 비우는 사이,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우라는 요양사선생님의 말에 따라,
 “엄마. 평생 동안 딸 하나만 잘되라고 기도하셨는데, 이렇게 밖에 못 해 드려서 죄송해요.

엄마. 평생 너무너무 애를 쓰셨어요. 혼자 얼마나 힘드셨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범도 미국에서 오고 있고, 나는 신부님 모시러 가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도 울고 요양사선생님도 울고, 원장님도 울고. 너무 울면 환자 분 떠나시는 길이 힘들다며 그만

그치라 한다. 겨우 눈물을 닦고 집에 와 샤워를 하고, 밤에 요양원에서 잘 준비를 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신부님을 모시러 갔다. 옆자리에 앉으신 신부님.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의연한 척하면서 신부님께, 마음의 준비는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연세를 물으시며 요양원에 가신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등 몇 가지 질문을 하셨다. 94세. 요양원에 가신 지는 3년. 퇴직 교장. 나는 무남독녀 외딸, 등 간단한 설명을 드리고, 엄마가 있는 방으로 모시고 올라갔다. 병자성사와 간단한 기도를 마치신 신부님이

 “아직 시간이 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언제라도 괜찮으니 또 오겠습니다”라고 하신다.


그 몇 시간 동안 엄마의 상황은 많이 좋아졌다. 시간을 벌기 위해, 요양원에서 하자는 대로 항생제를 쓰고, 비강으로 산소를 주는 일과 가래를 빼내는 일이 효과가 있었거나 신부님의 기도가 효험이 있었던지. 아니면 하나밖에 없는 사위 얼굴을 보고 싶어서. 엄마가 원하지 않으셨던 일들을 하면서 마음은 불편했지만, 남편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날, 엄마의 상태는 더 나아졌다. 급격히 하강되던 혈압도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산소 포화도도 나아졌다. 그러더니 산소를 공급하는 비강 장치가 불편한지, 손짓으로 그걸 떼어 내려고 하셨다. 불러도 대답을 안 하시던 엄마가, 불편함을 아신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인지가 돌아온 것으로. 전체적인 상황으로 볼 때는 많이 좋아진 일이었다.


일요일, 성당에 가 앉아 할 수 있는 기도는 단 한 가지였다.

“엄마가 편하게 해 주세요.” 신부님도 안부를 물으셨다. ‘좀 나아지셨어요. 위독한 상태는 지나신 것 같아요.’라고 답하자, ‘그러실 것 같더라고요.’ 하신다. 급하게 내려왔던 외사촌 동생부부는 서울로 돌아갔다.


월요일 새벽, 남편은 도착해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요양원으로 갔다. 의식이 명료한 것은 아니지만 부르는 소리에 눈도 깜박이고, 스푼으로 떠 넣어드리는 물과 유동식 등도 받아 마시며 연하작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산소를 빼고 편안한 호흡을 하면서 산소 포화도는 90 이상을 유지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는 다치기 전의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비상사태로 알고 온 남편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래도 생전에 얼굴 뵙고, 손도 잡아보고, 물도 떠먹여 드려 봤으니, 다행이라며 좋아했다.


매일 면회를 가도 싫은 내색 한번 안 하는 요양원도 고맙고, 혼자 울고 불고 하는 나를 잡아 준 친구도 너무 고맙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라도 다시 오겠다며 서울로 올라간 외사촌 부부도 고맙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전화를 걸어 준 친구들도 고맙다. 특히 먼 길, 한달음에 달려와 준 남편이 도착하자 내 마음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떤 상황이 생겨도 괜찮고, 엄마가 잘 견디어 주시면 더 고맙고. 남편은 내가 건강해야 이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다면서 맛있는 것들을 사 왔다. 밤이면 와인도 한두 잔 마셨다. 그래야 잠을 잘 수 있고, 다음날을 편하게 지낼 수 있다며.


아들과 통화를 하며 “할머니는 강하네. 잘 이겨 내시고.”라고 한다. 얼마나 더 우리들과 함께 계실지, 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많이 편해졌고, 허둥거림에서 벗어났다. 또 똑같은 시간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한 번의 응급상황을 만나 보았으니, 조금 더 편안하게 그 시간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이 한국으로 오고 있던 그 시간에 브런치의 <보글보글>에 “노”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한 글을 올리며, 나의 마음을 다잡았었다. 브런치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과 기도 덕택에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허락해 주신 그분. 그분께 감사에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요양원 언덕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남편은 어제저녁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2주도 안 되는 시간이어서 무척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다시 와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다시 온다는 약속을 했다. 예정돼 있지 않았던 위급상황으로 인한 방문이라 2주 만에 돌아갔지만, 다시 또 온다는 약속을 해준 그가 고맙다. 그리고 나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허둥거리지 말라며 어깨를 다독거려 준 그 푸근함도 감사하다. 언제라도 다시 온다는 남편과 절친과 외사촌이 있으니, 이제는 내 마음만 단단히 잡고 시간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 시간이 언제든, 이번에 덤으로 주신 엄마와 나의 시간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이젠 그만 운다고 다짐해 본다. 잘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여기에 앉아 바라본 수평선에 흰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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