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감기 몸살로 홍역을 치르고, 집안 청소도 대충 끝났다. 달라진 것 없는 집인데 텅 빈 느낌. 온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꽃을 사기로 하고 주말 아침 오랜만에 도시의 끝자락에서 열리는 농부들의 장터로 갔다. 얼마 만에 와 보는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인가. 오랜만에 남편과 다정하게 손잡고 하는 주말 아침의 데이트다. 늘 그랬듯이 장은 붐볐고 건너편의 오래된 빵집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시장기가 제법 도는 주말 아침, 고소하게 갓 구운 빵에 짭조름한 양파 수프 생각이 났다. 시장할 때 장을 보면 필요 없는 것들도 많이 사게 되니, 일단 요기부터 하고 장을 보기로 했다.
바삭한 바게트빵 한 개와 치즈가 넘쳐흐르는 양파 수프, 후식으로 멜론 한 조각이 나왔다. 한 숟가락 떠먹자, 그동안 잊고 지냈던 미국의 맛이 기억되었다. 거의 8개월을 잊고 있었던 맛. 어쩌면 이 짭조름 함은 돌아온 곳의 반가움 일 수도 있고, 빵 껍질의 고소함은 넓은 땅에서 만날 수 있는 여유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작은 곳에서 부대끼며 사는 곳이지만 정이 가득한 한국과 넓은 곳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사는 이곳 미국. 어디가 더 좋냐는 우문을 누가 던진다면 난 ‘정답은 없음’이라고 답하며, 이곳은 이곳대로의 여유와 한국은 고향산천의 정과 사랑이 가득한 곳이라고 말하며 그 경중을 논하는 것은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답할 것 같다.
붉은 벽돌의 오래된 작은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길을 건넜다. 파머스 마켓엔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꽉 찼다. 새로운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기웃거려 본다. 눈에 익은 채소가게 와 자연산 꿀을 파는 곳, 막 내린 향긋한 커피를 파는 곳까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시장의 가운데쯤 꽤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노천 꽃집. 야생화를 꺾어 묶음을 만들어 놓기도 했고, 화원에서 기른 꽃들을 보기 좋게 손질해 묶음으로 놓아두기도 했다. 값은 15불부터 35불까지. 그중 25불짜리 묶음 하나를 골랐다. 가운데에 해바라기를 두었고 주위엔 작은 꽃들의 부케. 집 안에 온기를 넣어주기에는 커다란 해바라기가 제격일 것 같았다. 그리고 채소 가게에서 파란 콩 줄기와 비트, 동그란 가지 2개를 사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 이 환한 꽃을 꼽고 싶어 서둘러 돌아왔다. 작은 화병을 찾아 얼음물을 붓고 꽃을 꽂는다. 갑자기 집안이 환해진 듯한 느낌. 이런 맛에 꽃이 시드는 것을 알면서도 꽃을 꽂는 것 아닐까 싶다.
그리고 어제, 며느리가 장미 한 다발을 사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서 사 왔다는 예쁜 말도 함께 건넨다. 이번엔 커다란 화병을 찾아서 풍성하게 장미 다발을 꽂는다. 분홍 장미가 방안을 더욱 환하게 한다. 꽃 두 묶음이 만들어 내는 온기로 이제 집이 푸근한 느낌이다. 이 빈자리가 꽤 오래갈 수도 있겠지만 꽃을 꽂으며, 친구들을 불러 간단한 식사를 나누며, 저녁 늦은 시간에 남편과 앉아 와인 한잔 하며 빈자리를 채워 봐야겠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 빈자리를 채워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 또한 지나가리니’ 하는 한마디가 내 옆에서 어깨를 다독이며 서 있지 않을까. 가끔 주말 파머스 마켓을 찾아 시끌벅적한 사람 사는 이야기도 청해 듣고, 매일은 아니더라도 미국식 아침을 챙겨 먹으며 진한 커피 향을 음미하기도 해야겠다.
작은 꽃들로 채워질 빈 공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꽃을 만지고 바라보는 마음은 따스함으로 가득할 것이니까…그 따스함이 이 빈 공간에 가득하길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