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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Dec 12. 2023

이 게으름의 끝은 어딜까?

나의 요즈음 모습


퇴직을 한 지 4년.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상당한 해방감을 맛보게 했다. 출근할 때 해야 하던 것들을 챙기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 같았고, 늦잠을 자는 것 또한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였다. 그러나, 서너 달 지나자 조바심이 일며 40년이 넘었던 습관은 나도 모르게 다시 돌아왔다. 일정한 시간에 깨서 가게에 나가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기도를 하는. 초등학교 때, 동그란 생활계획표를 만들어 노랑 시간에 기상, 빨강 시간에 공부, 파랑 시간에 책 읽기, 보라색 시간에 잠시 놀기 등 색색으로 칠해져 있던 규칙적인 생활. 그게 당연한 나의 모습이었다. 40여 년의 습관을 깰 수 없었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무슨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오며 ‘쉬지 못하는 나’를 천성이라고 치부해 두었다. 그러나 언제라도 엄마를 만나러 한국을 갈 수 있다는 것 만이 덤으로 얻는 기쁨이었다.


올해 여름 미국으로 돌아오며,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성당을 가는 똑같은 생활. 이어 가을엔 한 달여 유럽 여행을 다녀왔고, 그 유럽 여행기를 일주일에 서너 편씩 브런치에 올렸다. 여행을 하고 글을 올리는 동안에는 규칙적인 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행기의 에필로그가 끝나자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이유가 없는 게으름. 일찍 자고 새벽에 깬다. 억지로 운동을 가는 것을 제외하곤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다. 먹는 것도 귀찮고 밥을 하기는 더욱 싫다. 남편에게는 부엌살림을 종료한다는 워닝을 이미 주었다. 한두어 달 전부터 식욕이 줄며 운동을 겸하자 반사 이익으로 체중이 좀 줄었다. 몸은 가벼워졌는데 늘 기운이 없다. 종일 소파에 누워 TV를 보거나, 노트북 앞에 앉아서 유튜브를 뒤적거린다. 가게를 가는 일도 많이 줄었다. 동시에 모든 일에 의욕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의 연속이다. 밥도 하기 싫고, 이야기하는 것도 싫고, 청소하기도 싫고, 글도 쓰기 싫고, 책도 읽기 싫고, 누굴 만나는 것도 싫다. 그냥 누워서 멍청히 있다. 책을 읽어도 건성이다. 단어들은 눈 앞에서만 읽힐 뿐 뇌까지 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풋볼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화면은 지나가는데 꼭 돌려보기를 하는 것처럼 그 순간이 잡히지 않는다. 평생 음식을 안 해 먹었던 사람처럼 부엌이 낯설다. 방구석엔 먼지가 돌아다닌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매일 쓸고 닦고 정갈했던 살림을 완전히 놓아 버린 느낌. 그런데도 불편하지 않다. 내 인생의 사전에 ‘게으름’이란 단어는 절대 존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평생 체력도 정신도 너무 과하게 사용했기에 과부하가 걸렸고 이젠 쉬어야 한다는 뜻일까? 게으름도 습관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게으름이란 편안함. 종일 잠옷 파자마를 입고 내 방에서만 맴돌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상. 그런 게으름에 제법 익숙해지고 있다.  지난 늦봄 어느 날 엄마를 보내고 찾아온 커다란 상실감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우울증의 전조 증상인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억지로 이 상황을 밀어 내려하지는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게으름도 허락된 이 시간을 지내보려고 한다. 그 후의 일은 또 그다음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로키산맥 산정에 하얀 눈이 쌓였고 집 앞 나무에도 설화가 만개했다. 그 안의 차가움을 꽁꽁 숨긴 채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는 겨울 풍경. 내 마음 같다. 슬픔이 명치끝에 한이 되어 맺혀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하는 나를 깨우는 찬바람을 맞으며, 오늘도 커피 한잔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게으름의 담요를 뒤집어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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