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집안을 정리하고, 쓸고 닦은 지 이틀째. 겨우 봐 줄만 하다. 아직 차고는 가지도 못했다. 지난주 눈이 와 칼바람이 아직 차다는 좋은 핑계. 일단 미루지만 내일이라도 날이 풀리면 할 것이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집안일. 퇴직 후 한국을 오가며 살다 보니, 늘 떠 있는 듯한 생활. 오면 갈 준비, 가면 올 준비를 한다. 꼬박 5년째. 여독이나 시차 적응 같은 단어는 잊고 살았다. 도착하면 바로 다음날 일을 갔었고, 도착하는 날 친구를 만났다. 그렇게 몸을 부려야 빨리 적응이 된다는 이유를 대지만 신통하게도 몸 상태가 아직은 나쁘지 않아 가능한 일이다.
이번엔 미국에 좀 오래 있어볼 예정이다. 주부가 부재중인 살림살이는 그야말로 엉망진창. 곳곳에 쌓여진 물건들. 버려야 할 것들이 쌓여 있고 빈 박스들이 장식품인양 자리를 잡고 있다. 작동이 안돼 버리려고 내놓은 것들도 아직 제자리. 바닥이 눌은 냄비, 상처투성이 프라이팬들도 눈에 띈다. 몽땅 들어 쓰레기 통에 넣었다. 그러다 발견한 아직 박스도 뜯지 않은 주방 기구들. 열어 보니 프라이팬 세트와 돌솥만큼 무거운 냄비. 빙글거리며 혼자 돌아가는 베큠까지 다양하다. 혼자 있던 남편이 편해보려고 사다 놓았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언박싱.
빈 박스들이 재활용품 통이 넘치도록 넣어, 뚜껑이 닫히지 않는다. 꾹꾹 눌러보지만 소용이 없다. 다음 주 쓰레기 통을 내놓으려면 좀 힘들겠다 싶다. 그거야 남편이 하겠지.
그러다 좀 쉬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부엌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방. 책상 위에 컴퓨터 1대, 책꽂이 3개, 작은 소파, 펼쳐져 있는 요가 메트. 이곳에서 주로 나의 하루가 간다. 문을 닫으면 나만의 공간이 되는 곳. 이사를 오며, 내 방으로 한 이유는 부엌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편했고, 옛날 말로 주부가 지내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사를 와 다시 책을 정리하며 시집은 따로 모아 두었지만 수필과 소설은 뒤섞여 있었다. 분리를 해야지 쉽게 볼 수 있을 텐데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다 오늘, 이왕 정리 정돈을 시작했고, 좀 진득하게 미국에 있을 거면 예전 책들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소설과 수필집을 분리했다. 언제 샀더라, 언제 읽었더라, 책장을 넘겨 보기도 하고. 옛 기억을 더듬는다. 책장의 첫 페이지에는 언제, 어디서 샀는지 적혀 있기도 하다. 어느 날 내 기억이 희미해지는 시간이 오더라도 그 책장을 들추어 보며, 아~ 그땐 그랬구나, 할 수 있게. 선물로 받은 책도 있고 저자 싸인이 있는 책도 있다. 문학 강연과 피정에서 만났던 인연. 그분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 시간을 기억한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었고 그땐 무얼 열망했었는지.
소설과 수필은 거의 반반. 한때 소설을 써 볼까 생각을 하며, 샀던 레퍼런스 비슷한 책들. 동향의 작가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정희 소설가의 소설집. 오정희의 단편 <동경>을 읽으며, 극적인 사건이 없이도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책장 정리를 하다 말고 책을 다시 들추어 본다. 글에 가득 담겨 있던 노년의 쓸쓸함과 죽음의 그림자를 동경(구리거울)을 통해 비추어 내려했던 작가. 나의 오늘과 오버랩되며 지나간다.
이어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펼쳤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라는 한마디를 건졌고, 페이지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의 소설의 바탕이 되었던 여행. “이 책을 쓰는데 내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다”는 작가. 살면서 만나는 독서는 발품이 들지 않는 여행, 일 수 있다.
책장 정리를 하다 말고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책을 넘기며 추억도 내 곁에 함께 앉았다. 다시 읽기 시작한 고전들도 한쪽에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종이 책을 늘리지 않기 위해 요즈음은 이북(e book)을 선호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책장을 넘기며 추억을 들추어내는 행복. 이 소소한 기쁨이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 인지도 모른다.
책장에 정리된 책들 대부분은 읽은 것인데, 아주 생경한 책 들도 눈에 띈다. 겨울이 깊어지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바로 옆, 부엌에서 진한 커피 한 잔 내려, 커피 향을 음미하며 이 책들을 다시 읽어봐야 하겠다. 책장 정리를 하며 찾은 추억, 긴 겨울이 오면 책을 읽으며 추억은 켜켜이 쌓인 기억이 되며 더 단단해지겠지. 기다리는 마음은 벌써 온기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