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지 않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지만, 그것이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생존’과 ‘잘 사는 것’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분명 안전하기에 생존에 유리하지만, 그것이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며,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 생존에는 유리할 수 있으나, 잘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함광성,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경험이 축적되고 겁이 많아진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것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초조해지기도 했다. 나의 불안이 새로운 시도로부터 나를 막을 때 마음 한편에는 이 불안이 아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며 위안을 삼고는 했다. 그래도 이게 나에게 유리한 것이고 내 본능인 거야. 지나치게 낙관적인 사람은 그만큼 위험에도 많이 노출된다고 하지 않는가. 나의 불안은 내가 쌓은 빅데이터에 따라 내가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최적화된 것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이 구절은 ‘생존’과 ‘잘 사는 것’은 다르지 않냐고 반문한다. 최근 내 삶이 생존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이냐는 질문에 머리가 멍했다. 벌써 가물가물하지만 학생 때 나는 주저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고 현지에서 위험한 선택을 감행하고 유학을 결정했었다. 지금 집 근처에서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하는 것조차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 내가 잘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여전히 모든 것은 균형의 문제이고 내가 지금의 체력과 정신력으로 예전처럼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은 무리이자 때로는 진정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와 함께 오는 시큰둥과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면 생존이라는 핑계 아래 점점 재미없는 삶에 갇힌 채 (더 심해지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별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게 될 수 있다. 이제 다시 생존의 문턱을 조금씩 넘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