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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니 Aug 02. 2021

아바이순대와 막걸리, 그리고 대취타

밤낮없는 연중무휴 고성포차


'음주가무', '고성방가' 조금은 선을 넘는 느낌의 단어들이지만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술과 음악을 벗으로 삼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자성어가 아닐까. 젊은 시절, 언니, 오빠들을 따라가 화려한 조명 밑에서 심장을 방방 뛰게 만드는 EDM에 맞춰 함성을 지르며 한잔하는 술이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후에, ‘코요테’의 ‘순정’ 같은 8090 히트곡들을 틀어주는 동네 술집에서 사회생활 더럽게 힘들다며 넋두리하는 병나발의 술이 있었다.


20년 전에 함께 노래방을 들락날락했던 까까머리 친구들과 여전히 같은 동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우린 20년 전과는 다르게 흠뻑 취했고 세상도 그때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가혹했다. 우린 저마다 오래된 혹은 새로 생긴 생채기에 술을 퍼부으며, 그렇게 ‘말달리자’와 ‘친구여’를 목놓아 부르짖곤 했다. 시간이 흘렀고, 항상 엉망으로만 보였던 그 까까머리 친구들은 제법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이제 ‘친구여’가 아닌 ‘다행이다’의 세레나데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때쯤 고성으로의 이주계획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물론 뜯어말리는 분위기였지만.) 작은 동네에서 20년간 함께했던 5총사는 그렇게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고향에 내려놓고 온 지난 기억들의 한 편 같은 이야기다.


“아~ 그런 때도 있었지.“


‘탁!’ 캔맥주 큰 캔을 따서 꼴딱꼴딱 마시며 찰나의 감상에 젖는다. 선선한 바람 부는 계절 오전 11시, 지금 나는 고성의 한 해변에 앉아 새우깡에 캔맥주를 따고 있다. 왜 그렇게 매사에 필사적이었을까. 세상에 하나쯤 변한다고, 하나가 잘못됐다고 내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쓸데없이 힘 빼고 살았네.’라는 감상. 아니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친구들이 오히려 차를 바꿨고, 집을 샀다. 그동안 번 돈을 고성살이에 날려 먹고 있는 나보다는 더 성장하는 삶이지 않을까.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는 마이 올타임 페이보릿송 ‘홍대광’의 ‘답이 없었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고성에서의 내 친구는 맛있는 음식, 술, 그리고 TPO에 알맞은 음악이다. 바다와 하늘의 변주곡이 다양하듯이, 내 선택도 그들의 합주곡에 영향을 받는다.


중천에 떠 있는 해가 그 하의 밑단을 바다에 첨벙첨벙 적시며 반짝거리는 날엔, 점식식사를 대신할 닭강정에 시원한 캔맥주 한 잔이 제격. 이런 날의 BGM은 아일랜드 출신 밴드 ‘the corrs’의 ‘Would you be happier’로 통통 튀는 기분을 느낀다. 준비하는 일도 잘 되기를 바라며!


반면에 가끔 태백산맥 넘느라 힘든 설움을 토하며 구름이 울음을 쏟아낼 때가 있다. 이런 날엔 바다도 누가 그랬냐며 덩달아 성을 내곤 하는데, 그런 날엔 나도 함께 가만히 그 설움을 경청하는 날이다. 치즈나 과일에 드라이한 와인을 마시며 ‘Lianne La Havas’의 ‘Starry Starry Night’과 함께.


고성의 바다는 대부분 위로와 해방감을 주지만, 그와 반대로 가끔 무거운 그림자가 되곤 한다. 화려했던 여름이 끝나고부터의 밤바다는 쓸쓸하고 초라하다. 모두가 떠나버린 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다. 그러고는 불빛 하나 없이 끝없는 흑색의 바다가 족쇄를 끌어당긴다. 그 외로움은 바다뿐만이 아닌, 마을에 가라앉는 외로움이다. 이런 날엔 편의점에서 오징어숏다리 하나에 소주 한 병과 종이컵을 사서 해변가로 나간다. 음악은 따로 필요 없이 그저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이야기 삼아 한 잔씩 기울이는 날이다. 이런 날은 정말, 정말 가끔은 엄마가 보고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고성의 밤바다가 항상 우울한 것은 아니다. 몇 달을 보내며 알아낸 특별한 밤이 있는데, 이는 한 달에 며칠 안되는지라 무척 중요하다. 이를 준비하고자 읍내에 있는 막걸리 양조장을 갔다. 구경 겸, 몇 병 사올 겸 가보았던 건데, 이른바 ‘말통’이라고 옛날 기름통으로나 보던 20리터 플라스틱 통에 막걸리를 채워 판다고 한다. 고민하다가 결국 막걸리를 말통 채로 사들고 와서 마실만큼 옮겨 담았다. 과하긴 하지만 특별한 밤엔 이것만한 게 없을 것이다. 뒤이어 속초에서 공수해 온 아바이순대도 전자레인지에 데워지는 중이다.


기다렸던 밤이다. 바다는 머무는 이 없어질 때쯤 흑색으로 제 온몸을 뒤덮는다. 떠다니는 배 하나 없이 어두운 수평선이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그 위엔 둥그런 것이 하나 떠있다. 보름을 전후로 하는 오늘은 운 좋게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휘영청 밝은 보름달 비슷한 것이 뜨는 밤이다. 심연에 젖어있는 밤바다에 마치 모세가 길을 낸 듯 빛으로 길이 수놓아진다. 기대했던 것만큼 아름다운 밤이다. ‘내가 어둠 속에서 고성이라는 길을 찾은 것은, 저 달이 인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입속 가득 찬 아바이순대를 씹으며, 앞으로의 여정을 고민한다. 스피커에선 바다를 가로지르듯 힘찬 가락이 흘러나온다.



‘명금일하, 대취타, 하랍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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