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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엄마한테 좀 잘해"

엄마한테 잘했어야 하는 건 사실 아빠였는데

by 둥근네모

아빠는 우리 모녀 갈등에서 늘 방관자였다. 엄마의 무차별적인 언어폭력과 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나의 상황을 그저 '여자들의 예민함'으로 치부하며 한 걸음 떨어져서 남일처럼 말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수시로 "엄마한테 잘 좀 해라", "엄마는 네가 조금만 살갑게 하면 풀린다"라는 말을 했다. 요컨대 내가 먼저 엄마한테 애교를 부리고 사근사근하게 굴면 엄마가 좋아할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그렇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가 느끼기에 엄마와 나의 갈등은 모녀 사이에 으레 있는 투닥거림 정도가 아니다. 불시에 찾아와 평온한 일상을 깨부수는 교통사고나 자연재해 같은 개념이다. 내가 닮은 것 같아서 걱정되는 부분인데, 엄마는 본인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나중에 이렇게 저렇게 얘기해야지' 하는 조절이 잘 안 된다. 갑자기 지난주에 있었던 서운한 일이 떠오르면 상대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건 당장 전화를 해서 그 일에 대한 생각을 쏟아내야만 한다. 그 벼락같은 분노의 근원을 쫓아가면 깊숙이에는 아마 나를 향해 쌓인 서운함이 자리해 있을 것이고, 아빠 말대로 그것을 내 쪽에서 먼저 나서서 어루만져주면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에 있다가, 데이트를 하다가, 친구와 있다가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로 폭언을 몇 번이고 당하다 보면, 그래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느낄 때면, 엄마에게 카톡만 와도 심장이 쿵쿵 뛰게 된다. 누워있다가도 불쑥 가슴이 벌렁거리게 된다. 좋은 마음으로 엄마와 대화를 하다가도 그 안에서 엄마가 서운할만한 구석을 발견해 내면 언제고 다시 그런 재난이 닥쳐올 거라는 두려움이 늘상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먼저 무엇을 얼마나 '잘' 할 수가 있을까.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면, 나의 영혼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


이번에도 아빠가 내게 용돈을 찔러주기에 고맙다고 했더니 "엄마한테 잘하라고 주는 거야"라는 말이 돌아왔다. 발 밑이 새카맣게 무너졌다. 엄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상이 위태로워 상담 치료를 받고 있음에도 내색하지 않고 자주 가서 밥을 먹고 웃는 낯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날들이 이미 나의 뼈를 깎는 노력인 것을 정말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오직 나만 알겠지, 하는 생각들로.


울컥한 마음을 누르고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아빠에게 이 악물고 대답한 뒤에 돌아오는데,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잘했어야 하는 사람은 사실 아빠였는데.... 엄마가 오십 줄에 마지막으로 붙잡은 동아줄이 딸이게 된 데에는, 기댈 곳이 딸 밖에 없는데 딸은 나에게 그만큼 관심을 쏟지 않는다는 서운함이 까마득하게 높이 쌓여서 아무 때고 터져 나오게 된 데에는, 평생 쌓아온 아빠의 무심함이 작용했을 텐데. 아빠는 그 책임을 나한테 미루고 멀찌감치 서서 대수롭지 않게 "잘 좀 해라" 한다. 물론 가족들이 엄마의 외로움에 책임 소재를 물어 딱 떨어지게 퍼센트를 나눠가질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어쨌든 그 원인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게 분명한 아빠가 나에게 그 의무를 쉬운 말로 미루는 것은 조금쯤 억울한 일이다.


나는 어쩌다 엄마가 외로움을 호소하는 마지막 번지수가 되었나. 과거를 되짚어 이유를 생각해 보면 엄마가 정서적 의존의 대상으로 아빠를 애저녁에 제외한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빠야말로 엄마에게 잘했어야 할 사람 1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많이 나아진 부부관계에 기대를 걸어보며 이제라도 아빠가 엄마에게 "잘" 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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