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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다시 전세 살게 된 이유

by 자향자 Mar 14. 2025

   수원에서 서울까지 2년 넘게 출퇴근했다. 이른 아침, 지하철로 때로는 광역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출근해 열심히 일하고, 다시 대중교통으로 수원집으로 돌아오는 스케줄. 경기도에 살고 있고, 서울에 직장을 둔 이들이라면, 상상이 될 그림이다.



   신입 1년 차에는 먼 거리를 다녀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저 어느 곳에 소속되어 직장을 다닐 수 있음에 감사했고, 그 감사한 마음이 내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곤 했다.



   직장을 잡고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나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종종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독립을 하는 순간, 감당해야 할 부분이 상당했기에, 독립은 마음으로만 하고, 실제로 독립은 결혼 후에나 하게 된다.



   한 해 두 해 그리고 세 번째 해가 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막상 공무원 생활을 해보니, 업무 강도는 생각보다 높았고, 워라밸을 꿈꾸었던 나의 바람은 야근으로 여봐란듯이 줄 곧 깨지던 시기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피곤함도 배가 되었던 시기였고.



   공무원 준비할 때는 '합격만 시켜주면 불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라는 열정은 그 사이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내 열정은 어느새 사그라 들어 있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였달까? 하루 24시간 중, 4~5시간을 길바닥에 쏟으며 출퇴근하는 일에 지쳐가던 그즈음 나는 부모님께 이런 말을 종종 하곤 



"아, 직장이랑 너무 멀어. 힘들어 죽겠다."

"그러게. 멀긴 하다. 아들. 그래도 뭐, 별 수 있나? 버텨야지."

"그러게 말이야. 아 모르겠다."



   집에서 부모님과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터놓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피곤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내가 살았던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아버지 지인의 갑작스러운 이민 결정으로, 부모님이 매입하게 된 이 집과 동네에서, 나는 고등학교부터 공무원 입사 이후까지 무려 12년 넘게 이곳에서 지내왔다. 그만큼 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내 평생 3번의 이사를 다녔다. 대부분 10년을 채 넘기기 않은 시점에 이사를 다니곤 했는데, 아마도 부모님은 3번째 이사를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주욱 머무를 심산이셨던 것 같다. 이 집은 아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평생 아끼며 살아온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자산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헌신 덕분에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우리 형제 이렇게 5식구는 이곳에서 오랜 기간 머무를 수 있었다. 땀과 노력의 결정체라 불릴 수밖에 없는 집이었다.



   야근하고 퇴근 후 집에 온 어느 날, 어머니께선 내게 이런 말씀을 꺼내셨다.



"아버지랑 이사 이야기 나누고 있어. 그런 줄 알아."

"갑자기 웬 이사야?"

"너 힘들다면서. 어차피 할머니도 이제 안 계시고 동생도 지방에 있으니 굳이 큰집이 필요 없을 거 같다. "

"어디로 이사 갈 건데?"

"몰라, 이제 알아봐야지."



    도대체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낸 거지? 그렇게 부모님은 두 분이서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임장 활동하며 세웠던 기준은 매우 간단했다. 아들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



   부모님은 거미줄 같은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갈지 고민하셨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 신분당선 내 어느 역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개척할 예정이셨던 것 같다. 내 기준에서는 신분당선 지하철을 이용하면 좀 더 빠르게 출근할 수 있고, 환승도 한 번에 그쳤으니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긴 했다.



  몇 주 후, 아버지께서 나를 불렀다.



"우리 신분당선에 있는 상현역 주변으로 이사 갈 예정이다."

"오 회사랑 더 가까워지고 좋네요! 어디로요?"

"여기로 갈 거고, 주변이 비싸서 이 집 팔고 전세로 가기로 했다."

"전세요? 갑자기 웬 전세?"



   아버지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지하철역에서 가깝고, 집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은 곳은 매매 하기엔 가격이 부담돼, 어쩔 수 없이 전세로밖에 집을 구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나는 이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했을까?



   부모님은 틀림없이 내가 푸념 섞어 서울로 출퇴근하기 힘들다며 지껄인 말을 기억하고 계셨을 게다. 하루 이틀 마음에 쌓아놓으셨을 테고, 결국, 부모님까지 움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 부모님 인생의 전리품과 같았던 집을 팔고 임차인으로 변모하게 된 부모님의 사연에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당신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낸 소중한 보금자리를 떠나보내는 심정은 어땠을까? 내게는 어차피 집이 넓어서 줄여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못내 시원섭섭하지 않으셨을까? 내가 만약 아무 말하지 않았어도, 부모님은 그 집을 그 시기에 갑작스레 팔게 됐을까?



   새로 이사한 집은 연식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 아파트였다. 진짜 우리 집이 아니라는 사실 딱 하나만 빼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부모님은 그렇게 못난 자식 놈 덕분에 다시 전세를 살게 됐다. 부모님의 희생 덕분에 아들의 군소리는 쏙 들어갔다.



   훗날, 딸아이가 내게 동일한 제안을 해올지도 모르겠다. 고민이 되겠지만, 그 녀석을 위한 일이라면 나 또한 무엇이든 하겠지 싶다. 신분당선을 탈 때마다 부모님 생각이 난다. 그 시절 나를 위해 당신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셨던 부모님의 모습을 나 또한 닮아 가기로 했다. 이제 내가 받은 사랑을 딸자식에게 전달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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