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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Sep 09. 2024

엄마가 숨기고 싶었던 비밀

인생에 가방끈 길이가 뭐가 대수라고!

 내가 이 얘기를 온 동네방네(물론 글이지만)한 걸 알면 나는 엄마 전화번호 목록에서 얄짤없이 차단될지도 모른다. 자신감과 기세로 살아온 엄마에게 초졸의 학력은 어디 가서 선뜻 내놓기 어려운 치부와도 같아서 모녀의 끈마저도 끊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중학생이 넘어서야 초등학교가 엄마에게 마지막 배움이란 걸 알았다. 그 당시에 사정상 고교진학을 못 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하니 중졸까지는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학력위조가 기능직 공무원 당락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초졸이 아닌 중졸로 공무원에 합격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속속 벌어졌다. 일단, 영문이름이 문제였다. ABCD도 모르는 엄마가 그걸 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당일에 알려 줄 수 없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댔겠지. 그날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나를 닦달하고는 몇 번의 연습 끝에 자기 이름 석자를 영어로 말하고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엄마. 엄마는 왜 중학교를 안 갔어? 공부를 못했어?"

철딱서니 없는 중학생이 물었다.

"외할배가 안보내줘서 못 갔지. 너거 큰삼촌, 작은삼촌, 막내삼촌 다 대학 나오고, 너거 이모들도 다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내만 못 갔다. 딱 중간에 끼여가... 내가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이래 안살낀데."

땅이 꺼져라 한숨짓는 엄마를 보며 그땐 알지 못했다. 남들만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걸 그때 그 철없던 중학생이 좀 깨우쳤더라면. 돌이켜 안타까운 순간이다.


 엄마의 학력은 나의 남편도 우리 아이들도 알지 못한다. 절대 절대 말하지 말라는 엄마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으면 절대 초졸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인의 노력으로 영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신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소위 말하자면 급진개화파였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스마트폰을 가장 빨리 받아들였다. 누구보다 메신저를 빨리 이용했으며, 누구보다 스마트뱅킹을 척척 할 수 있게 되었다. 폴더폰을 고집하고 문자메시지 하나 보낼 줄 모르며 은행에서 현금인출도 못하는 고졸 친할머니와 늘 카톡으로 직접 손주들과 소통하는 초졸 외할머니의 학력을 거꾸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외할머니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타깝다. 외할아버지가 엄마도 다른 자녀들과 동등하게 고등교육을 시켜 주셨더라면 세상을 한 번 살째기 흔들어볼 정도의 인물은 되지 않았을까? 앞뒤짱구, 보기에도  영리하게 생긴 엄마! 온 가족의 주민번호와 생일, 전화번호는 기본이고, 손주들의 생일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수많은 노래의 가사 역시도 머릿속 어딘가 폴더가 있는지 안 보고도 척척 불러 낸다. 이건 아주 아주 기본에 불과하다.


"어쩜 니는 그걸 다 할 줄 아노."

고등학교 나온 엄마 고향 친구가 엄마한테 하는 단골 멘트란다. 스마트폰 활용능력 만렙인 엄마에게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하는 말이겠지. 그걸로 못 배운 엄마의 한이 다 풀릴리는 없겠지만, 초졸이든 고졸이든 지금 사는 건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먹고살기 바빠서 만학도의 꿈을 꿀 수도 없었고,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 살면서 최종학력을 늘리기 위해 이제와 무언가를 한다는 건 엄마에게 있어서 소모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엄마가 검정고시라도 보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엄마, 검정고시 볼래?"

"지랄하고 자빠졌다. 지도 대학 나와가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제에, 어데 연금 받는 엄마한테 웃기고 있네."

백 프로 장담컨대 이렇게 대답할 게 뻔하다. 그보다 이제야 편안히 쉬면서 노래하고 즐겁게 사는 엄마에게 나도 제대로 안 한 공부를 하라고 말할 염치가 없어서 그만둬버렸다.

 

 며칠 전, 고3인 큰 아이가 밤에 룸메이트와 응급실을 다녀왔다. 신경성 위염이 또 도졌는지 종일 토했다는 아이가 안쓰러워 엄마한테 그 얘길 했더니,

"대학 그거 뭐시라꼬. 고마 가지 마라 캐라. 부산 와서 할매랑 살구로. 뭐 그런 걸로 스트레스받아쌋노. 니도 아 머라카지말고. 안 아프고 건강한 게 제일이다. 대학 그거 안 나와도 게안타."

전화를 끊고, 1분도 되지 않아 내 통장에 또 5만 원이 꽂혔다. 이 정도 되면 나는 엄마한테 용돈 타내기 선수급인가 싶다. 물론, 그 돈은 아이에게 외할매의 정을 듬뿍 담아 고스란히 보내주었다. 왜 손녀에게 바로 보내지 않냐고 궁금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십 대의 나처럼 될까 봐 지레 겁이 나서 자체 검열하에 필요시 보내주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직접 만나지 않는 이상 그때그때 나에게 스마트뱅킹으로 돈을 보낸다.


 우리 엄마는 내가 학교 다닐 때도 좋은 대학을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내가 간다 하니 아무 말 없이 지원해 주었다.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한 적이 없었다. 엄마가 못해 본 인생을 내가 대신 살아야 한다고 주입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젊은 엄마였을 때 엄마가 나를 좀 더 높은 세상으로 인도해 주었더라면 하는 원망이 있었다. 중학교 때 성적이 비슷했던 애들이 의사 되고 교수되고 하는 게 부러웠다. 그 아이들의 엄마는 열혈 극성 엄마들이었다. 왜 우리 엄마는 나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 뭐라도 되어 있을 텐데.... 엄마의 무관심이라고 생각했던 생각 없는 젊은 엄마는 나의  아이의 성공을 위해 극성스러운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엄마가 옳았다. "백날 얘기하면 뭐하노." 수없이 들었던 그 말. 엄마는 이미 깨우쳤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 애비 닮아 고집 센 가스나들 백날 얘기해 봐야 지 똑똑한 척하고 살 건데 입다물자라고. 엄마의 공부 잔소리까지 이어졌더라면 나는 집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와의 관계가 비틀어지고 나서야 엄마가 현명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아무리 이끌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나는 많은 아픔을 겪고 나서야 깨우쳤다.


"그래 내는 국민학교 삐 못 나왔다. 그래서 뭐?"

엄마와 나의 동상이몽이긴 하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초졸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총명하고, 영특하며, 늘 새로운 걸 배우기에 게으름이 없는 그녀. 짧은 가방끈 때문에 평생 주눅 들어 살았을 그녀에게 누구보다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녀가 내 엄마라 너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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