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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Sep 05. 2024

엄마의 집착

자식 집착끝판왕 우리 엄마

 십 대에 미치면 사춘기
이십 대에 미치면 지랄병이라고
우리 엄마가 말했다.
 
나는 지랄병을 앓았다.  

 "사춘기 한 번 없이 착하디 착하던 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술 쳐 먹고 다니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나? 으이?"

 매일밤 엄마는 반쯤 눈이 풀린 나를 붙들고, 한스럽게 울면서 다그쳤다. 나는 십 대에나 겪는 사춘기를 스무살이 되어서 시작했다. 분노와 반항이 가득했고, 성인이라는 그럴싸한 면죄부는 나의 일탈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나의 지랄병은 결혼 전까지 이어졌다.

"니까지 와 이라노. 엄마 힘든데, 안 그래도 힘든데. 어?"

"그러니까, 이혼하라고! 왜 그러고 사노. 이혼을 하라니까?"

"이혼하면 달라지나? 뭐가 달라지는데?"


 싸우는 게 보기 싫어서 이혼하라고 엄마를 종용했다. 엄마 말처럼 이혼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엄마는 속이 상한 나머지 밤새 울었고, 자는 둥 마는 둥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하는 날이 허다했다. 엄마의 사정이야 그렇든가 말든가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안 마주치는 게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못된 생각이었는지. 삶을 돌이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진데, 나는 안 부끄러운 날 찾기가 더 어렵다. 인생자체가 후회고 어리석고 모자랐다. 부모 탓하며 그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나의 인생을 설계해 볼 수도 있었다. 성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꼬라지만 성인이였던 나는 나의 게으름과 허물을 부모 잘 못 만난 탓이라 단정짓고는 그들을 원망하고, 아프게 할 방법만 연구하는 데에 몰두해 있었다.

 대학 문제로 완전히 어그러진 아빠를 마주하기 싫었고,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의처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렇다고 탈출할 궁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성인으로서 자주 독립도 못 한 주제에 어줍짢은 핑계만 대며 뭉그적거렸다. 알바를 핑계로 새벽 두 시나 돼야 집에 들어갔고, 그렇지 않은 날도 모두가 잠든 시간이 지나야 집으로 향했다. 모든 상황이 끝난 후, 아빠와 엄마의 전쟁이 끝났을 즈음 들어가서 잠만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밤이 늦어지면 엄마는 수없이 많은 부재중 전화를 남겼고, 어김없이 나는 전화기를 꺼버렸다. 내가 집에 도착해야 엄마는 쪽잠이라도 잘 수 있었다.

 

 첫 월급으로 제일 먼저 부모님 속옷을 산다기에 한 번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번 돈은 내가 필요한 데만 썼다. 남들보다 빠르게 시티폰이며 핸드폰을 손에 쥐었고,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가차 없이 갈아치웠다. 90년대 후반, IMF로 대한민국 온 국민이 금 모으기에 앞장설 때 나는 나를 위한 금목걸이를 샀다. 그때만 해도 카드 모집원들이 학교 앞에 파라솔을 갖다 놓고 무작위로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던 시절이다.

"징글징글한 돈! 원 없이 써보자."

뒷일은 에라 모르겠다, 백화점이고 술집이고 되는 대로 긋고 다녔다. 4학년 2학기에 바로 취직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월급을 받기 시작했지만, 입금란에 숫자가 찍히기 바쁘게 각종 카드회사들이 출금란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은 마이너스 상황이 계속되었다. 내 대학등록금은 내가 갚아야지 심청이 모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IMF로 아빠가 하던 일도 중단되고, 엄마 혼자 세 딸 교육비에 생활비까지 벅차고 힘들었을 텐데도 엄마는 내 월급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알아서 모으고 있으려니 믿었다고 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뒤통수를 제대로 날렸고 말이다.

 그런 이기적인 딸인데도 밤길이 걱정되어 혹시나 인신매매에 연루되지는 않았을까? 나쁜 놈들한테 해코지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면서 가로등도 없는 동네 어귀에서 발만 동동 굴렸을 것이다. 지 애비 닮아 술 좋아하는 딸이 마른자리 진 자리 구분도 못 하고 어디 널브러져 있는 건 아닌지, 온 동네를 돌며 찾기도 여러 번이었겠지. 그렇게 밤마다 어떤 날은 버스 정류장,  어떤 날은 집 앞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산골생활, 산동네 시절보다 이 시기가 가장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장학금은커녕 쌍권총차기 일쑤였던 내 학비와 연년생 동생의 학비를 대느라 엄마의 손가락 관절은 하나씩 굽어지기 시작했고, 허리엔 협착증이 생기고 무릎엔 물이 찼다. 게다가 큰딸은 지랄병으로, 남편은 의처증으로 애간장을 태웠으니 속은 또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내 인생이 이 꼬라지인 건 다 부모 때문이라고, 나는 왜 그렇게 원망을 했을까? 이런 엄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복을 알아채지 못한 정말 지랄 같은 딸이었다.


"엄마, 할머니 톡 왔는데요?"

"왜?"

"엄마 전화 안된다고."

내가 전화를 안 받거나 톡을 오랜시간 안 보면, 우리 둘째 딸에게 전화해서 내 안부를 묻는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사위랑 싸운 건 아닌지. 그럼 또 번개같이 안심을 시켜줘야 엄마의 걱정은 끝이 난다. 심지어, 동생이 당직 서는 날은 밤 12시까지 잠 안 자고 버티는 양반이다.

"아니, 일은 은우가 하는데 엄마가 왜 안 자는데?"

"혼자 고생하는 게 안쓰럽다이가. 아까 톡 와가 보니까 불 나가지고 감식 나가면 늦어진다고 빨리 자라 카는데 잠이 오나? 안 오지. 좀 덜 바쁘다고 연락 오면 그때 자면 된다."

"참말로, 하루이틀도 아니고 불나고 변사가고 그게 지 일인데 우짤기고. 고생을 사서 하는 게 엄마의 매력이야?"

"문디 지랄한다, 가씨나. 니도 나중에 애들 품에서 내놔 봐라. 내 말이 무슨 말인가 알끼다."

 큰 아이 기숙사 사감선생님께 12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귀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된다며 주변을 한 번 찾아보겠다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의 소식을 기다리는 1분 1초가 그리 더딜 수가 없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손에 차 키를 집어 들고 출발할 채비를 하는데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습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나? 3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심장이 벌벌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그제야 엄마가 나를 기다릴 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미친년, 돌았었구나. 딸의 안전을 확인함과 동시에 나의 이십대가 생각나 그날 밤 한숨도 못잤다. 그때의 엄마가 되어 골목길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렸다. 버스가 내리면 쳐다보고, 버스가 끊긴 시각이면 택시가 오나 안오나 목을 빼고 있는 엄마가 되었다. 밤새 나를 기다리는 엄마에게 화도 많이 냈다. 지금 내 앞에 그 기지배가 있다면 뺨이라도 한 대 날려줄텐데. 정신차리라고 말이다.


 얼마 전에도 엄마의 톡을 본의아니게 씹은 적이 있었다. 걱정이 된 엄마는 손녀에게 또 나의 안위를 물었고, 조잘조잘 엄마의 상황을 보고한 손녀에 의해 내가 장염에 걸려 고생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우리 이여사. 병원도 다녀왔고, 괜찮다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실시간으로 내 상황을 손녀에게 보고 받았다.나 참,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딸 장염까지도....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지 모르겠다 싶어서 결국 전화기를 집어 들고 한 마디 했다.

"엄마, 알아서 할게. 걱정 좀 그만해라."

"걱정 안 하게 해야지. 뭘 잘 못 먹어서 그렇노? 병원은 갔다 왔다매. 내일 또 가라. 뭐 좀 먹었나? 엄마가 죽 해서 갖다 주까?"

"아니, 죽은 나도 할 줄 알고, 배달시키면 된다. 아따마, 걱정 좀 그만하소. 내일 병원 갔다가 전화하께. 알았제?"

"알았다. 약 챙기 먹고, 내일 꼭 전화해래이."



 자식이 아프면 엄마도 아픈가? 자식이 아프면 엄마는 더 아프다. 예전에는 이해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 셋을 낳은 건 복이 아니라 형벌일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한 만큼 내 자식들에게 희생해야 하는 업 같은 거 말이다. 지금도 하루라도 연락이 안 되면 안달복달이 되는 엄마. 족쇄 같은 느낌이 들어서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 각자 알아서 잘 살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저렇게 많을까? 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또 그 얼굴들을 보면서 세 딸이 힘든지 평안한 지를 관찰하는 엄마. 당신의 힘들었던 삶을 딸들도 똑같이 겪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아직까지 자식들과 연결된 탯줄을 당신 스스로 끊어내지 못했음일까?


"엄마, 무소식이 희소식이랬다."

"안다. 안 그래도 내 친구들이 딸들한테 그만 집착하라고 하드라. 내가 하도 너거한테 전화를 하니까."

"그래, 대부분 엄마들 매일은 연락 안하드라. 내 주변만 봐도. 엄마는 걱정인형이다."

 일흔을 앞둔 엄마가 오십을 앞둔 딸들이 걱정되어서 스스로 잠을 줄이고 아침저녁 메시지를 보내며 챙기는 모습에 조금 질렸을 즈음이었다. 외할머니 집착 때문에 미치겠다며 아이에게 농담조로 이야기했는데 큰 아이가 나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엄마도 외할머니랑 똑같다며 자기 걱정 그만하라고 한다. 모전여전 한자까지 들먹거려가며 말이다. 엄마의 집착이 버겁고 귀찮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하루라도 연락이 없으면 덜컥 겁이 난다. '어디 아픈가. 무슨 일이 있나.' 그래서, 이제는 내가 먼저 연락을 하게 된다.

 유쾌하고, 강단 있는 우리 엄마의 아킬레스건, 세 딸!!!!!!  큰딸은 지랄맞고, 둘째 딸은 헛똑똑이에 막내딸은 무뚝뚝이인데도 당신 딸들이 제일 예쁘고 착하다는 우리 엄마. 알려고 하면 할수록 어렵고 어렵다. 우리 엄마의 모성의 샘물은 마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단순히 걱정인형의 집착인 것일까?

 

 집착도 사랑임은 분명하다. 변질되지만 않으면 말이다. 스토커의 집착은 범죄이고, 자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구속하는 부모의 집착은 소유욕이고 억압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의 집착은 사랑이 맞다. 바라는 것 없이 베풀기만 하는 순수한 사랑. 나는 이제야 엄마의 집착이 딸들에 대한 사랑표현법인걸 안다. 이십 대 지랄병이 끝나고, 사십 대 갱년기에 접어들어서야 나는 엄마의 사랑이 고프다. 집착 또한 사랑임을 이제야 온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의 연락에 재깍재깍 답한다. 그동안 그 걱정의 원흉이었던 내가 아닌가. 오늘도 엄마는 전화를 하겠지? 그전에 내가 먼저 해야겠다. "우리 큰 딸아이가." 들어도 들어도 좋은 엄마 목소리. 이 목소리는 질리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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