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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Sep 02. 2024

40대 딸과 엄마의 동거

엄마는 영원한 둥지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얼마 전, 엄마를 잃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나는 그 친구와 있을 때는 늘 개그맨이 되고 싶다. 슬프고 힘들 텐데 어이없는 장난과 쓰잘데기 없는 말이라도 건네면 잠시나마 혼자만의 시간, 그 깊은 슬픔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아빠는 매일 술만 드시고, 의견을 나눌 만한 형제자매도 없는 그녀는 앞도 보이지 않고, 이정표도 없는 길 한가운데 덜렁 놓인 것처럼 보였다. 씩씩해야 한다는 그 망할 책임감을 잠시라도 벗어야 슬픔이 차지할 틈이 조금이라도 줄어들텐데 요령도 불효도 모르는 친구는 하루하루가 힘들어 보였다. 둘 다 최선을 다해서 서로 웃지만 속으로는 나도 그 친구도 울었음이 분명하다. 둥지 잃은 작은 새. 친구는 딱 그 모양이었다. 

 

 혼자 지내던 동생이 작년 여름께 본가로 들어갔다. 우울증이 다시 심해져 도저히 혼자 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에게 1억 가까운 돈을 빌려주었고, 그 친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죽어버렸다. 이미 그녀에겐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채무가 있었고 동생에게는 갚아야 할 대출금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친구가 죽고 나서야 그녀가 주식에 빠져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동생은 미련하게도 자기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켜 버렸다.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병신 같은 자책감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동생의 집으로 엄마를 불렀다. 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동생의 직장에 3주 간의 병가를 신청하고,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엄마는 그 길로 동생의 짐을 싸서 집으로 데려갔고, 일주일 후 계약기간이 남은 전셋집을 두고 본가로 짐을 다 옮겨버렸다. 처음엔 많이도 싸웠다. 할 말은 해야 하는 엄마 성격과 집안에선 지 할 말 다하는 동생. 부딪히고, 상처 주고, 상처 받고. 그런 날들이 한참 이어졌다. 편하게 살던 엄마의 일상에 툭! 떨어진 둘째 딸. 낮근, 밤근. 일정치 않은 동생의 근무 패턴에 엄마는 밤잠 설치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 합가 후 엄마가 쓰던 방을 동생이 사용하게 되면서 엄마는 거실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집안 똑띠 나가 반피'라는 우리 엄마 말이 있다. 이게 사투리인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집에선 똑똑한 척 다하는 딸이 밖에 나가면 호구 짓을 하니 센캐 엄마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했을까? 본인이 낳아놓고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엄마. 그러면서도 딸내미 먹일 고기를 쟁이는 엄마. 그렇게 미워했다던 딸의 간식거리를 사 오는 아빠...

 

 셋은 작년 말 동생이 분양받은 아파트로 다 같이 옮겼다. 본가로 들어가면서 그 집은 세를 주기로 합의를 했었다. 26평이라 좁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에겐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지 않나? 밖에선 안 통해도 집에선 통한다. 오래되고 낡아빠진 빌라는 하루라도 빨리 팔아치우고, 새 아파트로  옮기는 게 여러 가지로 옳은 일임을 계속 강조해야 했다. 익숙한 곳이 좋아서 안 간다던 아빠도 내 설득에 넘어갔다. 낡아빠진 빌라지만 엄마 아빠는 그곳이 더 편했을 것이다. 집을 보기 전까진 엄마도 한결같이 반대했었다.

"아파트고 나발이고, 엄마는 여기가 더 편하다. 만다꼬 이사까지 갈끼고."

"그러지 말고, 엄마 사전점검이나 같이 가자. 세 주더라도 그건 은우가 해야 된다."


 새 아파트. 그것도 세대수가 많은 1군 건설사 아파트다. 아파트에 살아 본 적 없는 엄마는 입구에서부터 풍기는 대단지 아파트의 조경과 새것이 주는 매력에 홀랑 빠져버렸고, 타워형 공간의 분리감, 엄마 방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레는 것 같았다. 기존의 빌라와 평수는 차이가 안 나지만 잡다한 짐들이 점령해 버린 방은 옳은 역할을 하지 못해서 거실 생활을 해 온 엄마였다. 냉장고가 차지했던 빌라의 방 대신 두 대의 냉장고도 거뜬히 들어가는 주방과 처음 분양받을 때만 해도 혼자 살게 될 거라고 오만가지 업그레이드를 다 해둔 덕에 신문물 보는 재미에 엄마는 덩실덩실 이었다. 참 감정표현에 솔직한 양반이다. 그렇게 이사한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언니야, 이거 봐바. 내 살찌도 이상한 거 아니제? 퇴근하고 씻고 나왔더만 이래 갖다놨드라. 살쪄서 밥 안 묵는다 했는데ㅋㅋㅋ."

"뭐고. 탄수화물 천진데? 맥주에 감자에 복숭아에 호박에 포도까지ㅋㅋㅋㅋㅋ"


 퇴근이 일정치 않은 동생은 방에서 엄마의 밥상을 받아먹는다. 누군가의 눈에는 별스럽지 않아 보이는 그저 그런 밥상일지는 모르지만, 나와 동생은 당신들과 끼니때가 다른, 갱년기를 코 앞에 둔 딸의 밥상을 매번 이렇게 차려주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루 종일 땀 흘리고 일하는 마흔 후반의 딸에게 맥주 한 캔의 서비스까지! 살찐다며 밥 대신 감자를 세 개나 올려 주는 것까지! 그녀의 건강백과와는 사뭇 다른 구성이지만, 투박한 말 뒤에 넘치는 사랑을 알기에 동생은 싹 비워내겠지. 그 힘으로 또 열심히 일하겠지. 그렇게 살이 10킬로가 쪄버려 슬픈 동생이다. 셋이 같이 있는 날은 치킨도 먹고, 코다리찜도 먹고, 엄마 아빠 두 분만 계실 때와는 분위기도 완전 달라졌다. 동생과 함께 더부살이 중인 고양이 세 마리도 이제 엄마에겐 소중한 반려식구가 되어버렸다.

단톡방에 올라 온 엄마네 냥이들

 "이제 내랑 냥이들이랑 이래 평생 살자. 결혼하지 말고. 알았제?." 

그렇게 재혼을 고려해 보라던 엄마는 이제 결혼을 할까 봐 겁이 난단다. 같이 사니 든든하고 좋다나 뭐라나. 동생이 3주간 연수로 집을 비웠을 때 엄마는 매일 동생이 보고 싶어서 내게 전화를 했다. 동생은 엄마가 걱정되고 엄마는 둥지 떠난 딸이 그립고. 엄마랑 같이 살고 있는 게 꿈같다는 동생. 새로운 둥지에서 그녀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열심히 살고 있다. 나는 둥지 떠난 철새. 이제 추석이 온다. 나도 영원한 내 둥지로 날아갈 계절이 오고 있다. 영원했으면 좋겠다. 모두가 호호백발로 한 집에 모여 하하호호 옛날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친구가 겪은 빈둥지증후군이 조금만 더디 오길... 오늘도 글자에 꾹꾹 담아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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