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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Sep 28. 2022

철밥통이라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평범한 오후, 한 중년의 여성이 역무실을 방문했다. 여성의 "가까운 ATM기 어디 있어요?"라는 물음에 평소처럼 역사 내에 있는 편의점 ATM기를 알려드렸다. 그런데 "그건 수수료 나오잖아요. 수수로 안 나오는 건 없어요?"라고 되물었다. 여성이 거래하는 은행 중에 마침 A 은행이 우리 역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이번에는 A 은행의 위치를 안내했지만 "거긴 너무 멀어요. B 은행이나 C 은행 ATM기는 어디 있어요?"라는 물음이 돌아왔다. 우리 역 근처에 없는 B, C 은행의 ATM 기계 위치까지 역무원이 다 알 수 없다. 거기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나의 답변에 돌아오는 대답은 참혹했다.


"당연히 알아야지. 왜 그걸 몰라요?"


 욕 한마디 없지만 참으로 무례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히는 사이 머릿속에는 온갖 항변이 떠올랐다. '고객님 여기는 은행도 아니고 ATM기 안내소도 아니에요. 가장 가까운 ATM기나 은행 위치는 서비스 차원에서 알아 놓는 거지 우리 역에서 걸어갈 수도 없는 거리에 있는 것들까지 다 알지는 못해요. 그렇게 중요한 일이면 네이놈에서 직접 찾아보세요. 저는 말하는 네이년이 아니에요.' 하지만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말들 중에서 내가 꺼낸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다행히 중년 여성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역무실을 나갔다.


 역무원으로 일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 무례함 앞에 '참 교양이 없으시네요!'라고 받아치지 못하는 감정 노동자라는 것이 서글플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사과에는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다양한 마음들이 숨어든다. 과도한 요구에는 '더 이상 제가 도와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의미가, 무턱대고 화를 내는 고객에게는 '무례한 태도를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을 담아 사과를 한다. 비록 그들이 듣는 말은 '죄송합니다' 다섯 글자지만 나는 이 다섯 글자를 통해서 부드럽게 거절을 하기도 하고, 빨리 상황을 모면하기도 한다. 실제로 민원을 제기하는 고객들 중에 구체적인 역의 사정이나, 역무원의 입장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이 자신이 겪은 불편을 알아 달라거나, 문제를 빨리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다 보니 그들에게는 긴 설명보다 단순한 사과의 말이 먹힌다. 나의 죄송하다는 말은 가장 간편한 해결책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간 사과 뒤에 숨겨진 말들을 꺼내서 보여주고 싶었다. 왜 멀쩡히 잘 나오는 CCTV를 보여주지 않는지, 왜 할머니의 가족 사항은 캐물으며, 왜 한 번만 봐달라는 부정승차자를 봐주지 않고 죄송하다고만 하는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역무원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일반 시민들이 알게 되면 죄송할 일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철밥통이라 죄송합니다'라는 매거진은 그런 마음에서 출발했다. 역에서의 나는 일일이 설명하지 못하지만 내 글을 읽은 누군가에게 진심이 전해지기를. 그렇게 조금씩 고객들과 우리의 간극이 좁혀지기를 희망하며 글을 썼다.


 처음 글을 발행할 때만 해도 '게으른 철밥통이 배부른 소리 한다'라며 악플이 주렁주렁 달리지 않을까, 댓글에서까지 죄송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나의 걱정과는 달리 이해심이 잔뜩 묻어나는 응원과 감사의 댓글들이 달렸다. 응원에 힘 입어 나는 또 열심히 소재를 찾고 글을 썼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사과의 말을 하는 만큼이나 고객들을 통해 감사의 말을 많이 듣고 있다는 것, 역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 소재를 고민하며 돌이켜본 나의 역무원 생활은 생각보다 화사하고 온화했다.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역무원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이런 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 덕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역에서 온종일 죄송했다. 또 한편으로는 온종일 감사의 말을 들었다. 내 글이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한들 나의 일터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을 안다. 그래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의 다섯 글자 짜리 사과에 또 다른 의미를 담아본다.


'죄송한데요, 이 얘기 글로 써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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