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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Aug 31. 2022

날씨의 요정

재난에 대처하는 지하철 직원들

 지하철 직원들에게는 비와 싸웠던 무용담이 한 가지씩은 있다. 나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 딱히 비와 싸워본 적이 없다. 비와 싸워본 적이 없다는 것이 나의 무용담이라면 무용담일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일하는 지역에는 기록적인 게릴라성 호우가 쏟아지면서 큰 피해가 발생한 적이 있다. 그 해에는 유독 큰 비가 많았다.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사용해야 했던 수방 자제들은 제 위치를 잊은 듯 보였다. 특히 늦은 밤이나 새벽시간에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대부분의 역들이 여름 내내 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갑작스러운 집중호우가 내려 도시 곳곳이 물에 잠기고 사망자까지 발생한 것이다. 당시 나의 근무지도 비 피해가 심각했는데, 그날 나는 열심히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나는 딱 두 번 휴가를 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휴가를 쓸 때마다 큰 비가 쏟아지는 것이다. 우리 역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비 피해에 대한 인계를 받고 있자면 윤대리는 매번 어디 있었냐고 말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맹세코 나의 휴가와 일기예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나의 휴가 날 일기예보에는 호우주의보는커녕 비 소식도 없었다. 심지어 큰 비 예보가 내려와도 내가 출근한 날에는 싱거운 가락 비만 흩날리다가 거짓말처럼 날이 갰다. 그 해 기상청이 원 없이 먹은 욕에는 나의 지분도 일정 부분 있을 것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조 선배들이 고생한 얘기를 들으면 뭔가 내가 잘못한 것처럼 기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모래주머니를 옮기느라 팔다리에 근육통이 와서 쩔뚝거리는 선배들을 보면 한없이 작아져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또 휴가를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같은 조 후배는 나를 토템으로 하는 종교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선배님, 아니 날씨의 요정님, 휴가 쓰지 마세요!"


 그 여름 나는 나이에 안 맞게 날씨의 요정으로 불리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오천원짜리 로또 한 장 안된 걸 보면 정말 날씨에 운을 다 쓴 게 틀림없다.


 나처럼 나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재난 앞에 빛나는 영웅들이 더 많다. 앞서 말한 폭우로 사망자까지 발생했던 밤, 큰 침수 피해를 입은 역에 달려왔던 직원들이 그들이다. 완전히 침수되어 언제 정상화가 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밤새도록 물을 퍼내고, 흙탕물로 더러워진 역사를 쓸고 닦고, 침수된 기기들을 수리한 직원들 덕분에 다음날 첫차부터 정상 운행을 할 수 있었다. 또 각각의 역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비를 뒤집어쓰면서 밤새 싸운 사례들이 수없이 많이 보고 됐다. 폭우가 지나간 뒤 사내 게시판에는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는 글이 올라왔고, 칭찬과 응원의 댓글이 끝없이 달렸다.


 지하철 직원들이 큰 비가 올 때까지 무작정 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예고되면 배수로를 정비하고 침수 위험이 높은 역은 모래주머니와 차수판을 미리 배치해놓는다. 역마다 당직을 서고, 운영사업소에도 비상근무를 한다. 비뿐만이 아니다. 눈과 추위에 취약한 경전철의 경우 비상근무를 하며 밤새도록 선로가 얼지 않도록 열차를 운행한다. 그렇게 미리부터 대비를 한 날은 큰 사고가 없다. 물론 아무리 준비해도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큰 재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특히 예보 없는 날 갑자기 내리는 큰 비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장마는 끝난 듯 보인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태풍은 가을에 더 많이 온다. 운이 좋게도 아직까지는 물과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지만, 언젠가 나의 무전 무패의 무용담은 깨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단 일승으로 무용담을 뽐내게 될 것이다. 나이에 맞지 않는 요정은 이만 은퇴하고 날씨의 전사가 돼볼까 한다. 올해는 휴가를 쓰지 말고 로또를 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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