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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Sep 07. 2022

명절날의 지하철 풍경

명절에 역무실을 지키고 있노라면

 교대 근무의 가장 큰 장점은 남들 일할 때 놀 수 있다는 것이고, 교대 근무의 가장 큰 단점은 남들 놀 때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개구리 같은 삶이지만 그래도 평일에 줄을 서지 않고 유명한 맛집을 들락거릴 때면 교대 근무자라는 게 너무나 짜릿하고 즐겁다. 하지만 달력에 빨간 숫자들이 연이어 붙어있는 것을 보면 낮에 먹은 맛집 음식이 장 어디쯤에 콱 막혀 있는 것 같다. 특히 긴 연휴가 보장되는 설이나 추석에도 나는 늘 근무 중이다. 역무원들도 사람인지라 명절에는 가족과 보내고 싶고, 멀리 고향에 방문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다. 안 그래도 몇 개 없는 휴가 자리가 명절에는 더더욱 꽉꽉 차는 걸 알기에 다들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한다. 그래서 내게 명절에 휴가를 쓴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결혼을 하고부터는 멀리 있는 시댁에 방문한다는 명분으로 가끔 눈치 싸움에 참전하는데, 그마저도 명절 당일은 포기하고 전후로 휴가를 내는데 만족해야 한다.


 눈치싸움에서 패배하고 명절에 역무실을 지키고 있노라면 연휴동안 도시 전체가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부터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게이트는 혼잡해진다. 평소 퇴근시간에 보는 모습과는 달리 모두들 한 손에는 짐가방을, 한 손에는 선물을 들고 게이트를 통과한다. 색색의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선물 꾸러미들을 보고 있자면, 미쳐 포장하지 못한 고향에 돌아가는 들뜬 마음이 슬쩍 보이는듯하다. 눈치 싸움에서 밀려 휴가를 쓰지 못한 지하철 직원들에게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울 것이다.


 그렇게 고향으로,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마침내 도시는 텅 비어 공허함만이 가득해진다. 명절 당일의 도시는 마치 연휴를 맞아 늦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하다. 물론 명절에도 일해야 하는 나에게 그런 고요함도 나쁘지는 않다. 뱃속이 공허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요즘은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이 많지만, 지하철이 꼭 도시 한가운데서 이런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십 분을 걸어가야 겨우 편의점이 나오는 외진 곳에 위치한 역들도 있는데, 당연하게도 주변에 변변찮은 식당도 잘 없다. 그런 역에서 근무할 때는 저마다 차례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싸와서 함께 점심을 먹곤 한다. 각 가정마다 자랑하는 메뉴로 꾸려진 거한 점심상이 차려지면 역무실에서도 제법 명절다운 분위기가 나는 듯하다. 하지만 다들 집이 멀거나, 집에서 명절 음식을 만들지 않는 근무자들만 모였을 때는 역무실의 명절 밥상은 컵라면으로 채워진다.


 명절 내내 한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향에 간 사람이 있다면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명절 당일 오후가 되면 오랜만에 고향집에 방문해 관광을 온 타 지역 사람들이나,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처음 우리 지하철을 이용하는 타 지역 사람들이 오면 이래저래 안내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거주지의 지하철과 사용법이 달라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아서 손이 많이 간다. 그래서 아직 지하철을 텅텅 비어있어도 역무실만은 바쁘다.


 드디어 연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지하철은 다시 활기를 찾아간다. 짐가방과 선물을 가져갔던 사람들은 이번에는 짐가방 옆에 보자기로 곱게 싼 짐 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돌아온다. 보자기 사이로 고소한 냄새가 새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연휴 내내 자식들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더 줄 것이 없나 아쉬운 마음에 반찬통 한가득 담은 음식들일 것이다. 묵직한 것이 아마도 고향 부모님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다들 먼 길을 다녀오느라 얼굴은 피곤해 보이지만, 고향집에서 아랫배를 두둑이 채워온 덕분인지 짐을 든 두 손은 야무지고 힘이 넘쳐 보인다. 그렇게 충만해진 마음으로 도시도, 지하철도 밀물이 밀려오듯 다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다시 일상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연휴가 끝나고 지하철은 평소보다 바빠진다. 연휴 내내 밀려있던 고장 조치들이 이뤄지고, 휴일을 보낸 본사나 사업소의 일근 근무자들이 출근을 시작하니 역에도 업무가 잔뜩 내려온다. 명절에도 쉬지 못하고, 명절이 끝나면 더 바빠지지만 그래도 나는 명절이 좋다. 평소 출퇴근 길에는 보지 못했던 생기 넘치는 승객들을 만날 수 있고, 도시가 잠들었다 깨어나는 생동감을 엿볼 수 있어서 역무실에서의 명절도 내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이번 명절에도 나를 비롯한 지하철 직원들은 안전한 여정을 위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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