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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oxiweol Nov 08. 2024

기억을 기록하는 일.

   하루, 일주일, 한 달은 참 바쁘게도 지나간다. 하루의 막을 내리고 의식적으로라도 자리에 앉지 않으면 오늘 느꼈던 감정과 사건들을 기록할 시간조차 빼앗겨 버리고 만다. 그래서 기록은 더 소중하다. 누군가는 그날이 그날이고, 어차피 지나간 것을 애써 남겨두어 무엇하느냐고 묻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제의 나도 너무 피곤해서 하루 돌아보기 기록을 건너뛰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면 예외 없이 영 찝찝한 마음이 든다. 온전히 어제를 잘 보내지 못한 기분. 어제 있었던 일들로 오늘까지 그 감정을 끌고 온 기분. 새로운 하루는 이미 시작되었는데 여전히 지난 시간에 머물러 있는 기분. 나에게 하루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건 그런 일이다. 나만의 대나무숲에 진하고 명료한 단어들로 소리치는 일.


   아이러니하게도 좋았고, 행복했던 날들의 기록보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더 적어두는 것 같다. 다시 들춰보기 싫지만, 기어이 분해하고 펼쳐서 시간대별로 감정들을 기록한다. 다행인 건 그렇게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분명 이전보다는 나아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결론이 없더라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도 마지막 문장은 늘 희망찬 문장, 나에게 위로를 주는 문장으로 끝맺음을 적었다.


   기억보다는 기록을 믿는다. 보통은 한번 적고 나면 그 문장들을 다시 펼쳐보는 일은 드물지만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들에는 다양한 감각들이 담겨있다. 더웠는지, 추웠는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기분이 좋았다든지. 종이 위에서 그때의 공기가 불어온다. 입에 넣었던 음식들에 대한 맛이 혀끝으로 느껴져 다시 침을 고이게 한다. 그와 좋지 않은 감정들로 이런저런 모진 말들을 뱉어낼 때 내가 입고 있던 옷의 촉감이 살갗을 스친다. 속상한 날 흘렸던 눈물이 뜨거웠는지, 차갑게 식어갔는지 양 볼로 온도가 느껴진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금보다 점점 더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 서랍을 채울 것이다. 서랍의 개수가 기억보다 적어서 다 담아내지 못할 테니 끊임없이 두 손으로 잘 쓰든 쓰지 못하든 어떤 문장이라도 남겨놓고 싶다.


   나를 위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또 쓰다 보면 한 문장이라도 잘 쓰고 싶어 진다. 어떤 문장이, 무슨 내용을 담은 이야기가 잘 쓴 것일까? 누구는 좋다고 한 문장도 나에게는 별로였던 문장들도 많았다. 그냥 자기에게 맞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잘 썼다고 하는 걸까? 오늘도 그런 고민을 하며 글을 남기고 하루를 기록한다. 



24년 3월, 제법 따뜻했던 어느 날.

-오늘은 언니와 동네 뒷산을 올랐다. 곧 봄이 온다고 낮에는 제법 따뜻했다. 두꺼운 패딩은 잠시 접어두고 적당한 두께의 환절기 외투를 꺼내 입었다. 어제까지 미세먼지가 최악이라서 영 별로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청명하고 맑은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다. 답답할 때는 기록만큼 좋은 것이 자연 속에서 냅다 걷는 일이다. 매번 오르는 길이지만 여전히 헉헉대며 뒷산 언덕을 올랐다. 그리 높지 않은 동네 뒷산 맨 위에 서 있으면 등골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그 땀을 식혀주는, 아직은 차가운 공기를 담고 있는 바람이 불어온다. 그 순간이 참 좋다. 걷다가 우연히 듣게 되는 어르신들의 대화 속에서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사람 사는 일, 나이가 적든 많든 하는 고민들은 다 똑같구나. 를 느끼기도 한다. 주인과 함께 산책을 즐기는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며 미소 지어 보이기도 한다.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산을 오르면서 언니와 나누는 대화들 덕에 산행 시간이 더 의미 있기도 하다. 이 시간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작게 바라본다. 각자의 일로 조금 바빠지더라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헛소리로 깔깔대며 정상에 오르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그곳에서 힘든 일들, 걱정거리들을 덜어내고 시원하고 맛있는 커피를 기대하며 다시 씩씩하게 내려오는 순간들. 오늘은 제법 좋은 기억과 순간들로 하루 기록을 마무리한다.



   내일도 잘 살아내 봐야지.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잘 극복하며 나아가야지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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