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랑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계절이 있다. 그건 '여름'이다. 십 대를 이미 훌쩍 지나온 나이임에도, 20대의 끝자락을 겨우 지나온 나이임에도 18살의 여름만큼은 마치 어제의 장면처럼 눈에 선하다. 수업 시간보다 더 기다린 시간은 옆 반의 그 애가 농구를 하는 점심시간이었다. 하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농구공은 튕기는 모습은 주변에 있던 다른 남학생들보다 더 멋있어 보였고, 누구보다 하얀색 셔츠와 네이비 바지의 하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웃긴 건지 슬픈 건지... 단 한 번도 우리는 같은 반을 해보거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저 복도를 지날 때 살짝 보고, 급식실에서 줄 설 때 그 애 뒤에 서보고. 그렇게 그 나이대에만 할 수 있었던 짝사랑을 키워갔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유일하게 일주일에 3시간. 같은 교실에 앉을 수 있었던 수업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동수업 시간이었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애와 같은 이과였다. 그래서 생물 시간이라도 한 곳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역시나, 그렇다고 같은 조가 되는 행운은 없었다. 펜을 떨어트렸을 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그 애가 내 펜을 주워서 건네어 주었던 정도. 딱 그만큼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꽁꽁 숨겼다. 같은 반 가장 친한 여자친구들만 아는 정도였고, 뒤에서 몰래 설레어하며 미소 지었다.
뭐랄까, 그 마음을 그 애가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친구도 뭐도 아닌 그 애가 혹시라도 이런 내 마음을 안다 해도 관심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알게 된다면 나의 소중한 마음까지 사라질 것 같은 기분. 그땐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좋았다. 혼자만 좋아하고 싶은 마음. 알리지 않고 조용히 간직하고 싶은 간질거림.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의 재수 생활을 끝낸 후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연히 동네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그 친구를 보게 되었다. 우습게도 그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이 친구를 왜 좋아했던 거지?'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손에 음료를 들고 카페를 나오며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말을 하던 사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내 마음을 알리지 않았던 과거의 나에게 잘했다고.
그래도 복도 창문으로 농구코트를 바라보며 수줍어하던 18살의 여름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 그때는 그 설렘이 나의 하루하루를 빛나게 해 주었으니깐. 지금도 초록이 무성한 여름이 오면 가끔 그 여름을 떠올린다. 그 친구가 메고 다녔던 파란색 가방을 바라보며 등교하던 아침이 보인다. 잠에서 덜 깬 나의 아침을 들뜨게 했던 등굣길.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오늘도 그 애와 함께 등교를 했다며 친구들과 소란스럽게 아침을 열던 나의 열여덟 여름.
어쩌면 나는 그런 감정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던 그때의 내가 그리워, 여름에 한 짝사랑을 핑계로 자주 틀어보는 단편영화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