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 제목은 ‘Foreigners Everywhere’(어디든 외국인이 있다)이며 총감독은 남미 출신의 학예사,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o Pedrosa, 브라질)가 맡았다. 총감독을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인물이 맡는 건 베니스 비엔날레 역사상 최초이다. 2022년의 총감독 선출 결정과 2023년 전시 제목의 결정은 유럽, 북미 중심의 미술계 흐름에서 소외된 아티스트를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물론, 우경화된 이탈리아 정치계와 비엔날레 주최 측의 갈등이 우려된 적도 있었지만 비엔날레 측은 총감독과 전시 제목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처음의 의지대로 비주류 국가 출신의 아티스트를 위주로 전시를 진행했다. 많은 전시, 특히 이런 대규모 전시의 경우에는 비유적인 전시 제목을 택해 다양한 예술 의도를 가진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전시한다. 2017 년 리옹 비엔날레가 대표적인 경우로, 당시 제목은 ‘Mondes flottants’(부유하는 세계)였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하는 작업이 전시되었다.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는 그와는 좀 다르다. 주제 전시에 들어가는 관객은 일반적으로 전시 제목을 보고 들어가는데 ‘Foreigners Everywhere’라는 제목은 이미 너무 많은 걸 이야기한다. 관객에게 해석의 틀을 좀 더 세부적으로 제시해서, 너무 헤매지 않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해석의 몫을 제한하기도 한다. 사실 전시는 많은 평론가와 언론이 보여주듯, 이전 비엔날레 전시만큼, 아니 그보다 더 훌륭했다. 특히 미술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아티스트들을 선보이고 그래서 현대 미술이 지리적으로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게다가 아르세날레관 전시에서는 훌륭한 작품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서사도 즐길 수 있다. (‘2024 베니스 비엔날레 - 천으로 전시 읽기’ 참조) 본 글에서는 그럼에도 남는 아쉬움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다. 아무리 별로인 전시라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것처럼 훌륭한 전시도 아쉬운 점은 있기 마련이다.
전시 제목의 문제 : 외국인 ? 이방인 ?
전시 제목의 분석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제목은 ‘Foreigners everywhere’ 이며, 이탈리아어로는 ‘Stranieri Ovunque’ 이다. ‘Foreigner’ 는 문자 그대로 외국인이라는 뜻이며 이탈리아어의 Stranieri 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전시의 선한 의도를 강조하고 싶었다면, 그래서 정치적 주제를 외면하지 않는 현대 미술의 경향을 그대로 이어받고 싶었다면 ‘외국인’이라는 표현보다는 ‘이방인’이 더 잘 어울린다. 총감독 페드로자는 아트뉴스페이퍼(Artnewspaper) 프랑스판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주변에는 항상 외국인이 있으며 때로는 각자 자신도 자기에게 외국인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페드로자의 말을 분석해봐도 ‘외국인’보다는 ‘이방인’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굳이 ‘외국인’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비유럽, 비북미 국가 국적의 아티스트를 많이 전시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미술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유럽, 북미 국가의 사람들이 보기에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은 외국인일 테니 그렇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외국인이라는 표현을 쓰며 모든 것이 다 섞이는 느낌이다.
이방인이라는 표현은 영어로는 ‘Stranger’로, ‘Foreigner’와 구별되어 쓰인다. 이탈리어에도 ‘이방인’을 의미하는 단어는 따로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어로 ‘이방인’이라고 표현하는 건 다소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어로 이방인은 ‘Forestiero’로 현재 자주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Étranger)도 이탈리아어로는 Stranieri(외국인)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이탈리아어에서 ‘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고는 하지만 잘 쓰지 않기에, ‘Stranieri’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단어’Étranger’처럼 이방인, 외국인의 뜻을 다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어의 경우는 다르다. 영어는 ‘Stranger’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는 영어 단어의 경우에는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이방인이냐, 외국인이냐?’ 총감독은 이방인보다 외국인을 선택했고, 그래서 혼란이 시작된다. 이방인이 도처에 있다는 것 보다는 외국인 아티스트도 존재한다는 것이 더 강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외국에도 아티스트가 있다 !!
지아르디니관의 추상화를 전시한 공간인 Nucleo Storico Abstractions (주요 역사, 추상) 섹션이 전시 기획의 방향을 아주 잘 보여준다. 지아르디니관의 입구에 있는 닐 얄터(Nil Yalter, 올 베니스 비엔날레 명예 황금사자상 수상)의 유목민 천막 형태의 설치 작업(Topak Ev., 1973)과 비디오 설치 작업(Exil is a hard job(망명은 힘든 직업이다), 1983-2024)을 지나면 추상화로만 채워진 전시 공간이 관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관객은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곧 전시장에 마련된 설명을 읽고는 전시 제목을 토대로 작품의 의미를 쉽게 파악한다. 설명에 의하면 ‘추상’ 공간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남미에서 활동한 추상화가(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들을 모아놓은 공간이며 그들의 작품은 비록 형태에 있어서는 유럽, 북미 화가들의 추상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영감을 가지고 다른 의도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Nucleo Storico Portraits (주요 역사, 초상화) 섹션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서양 근대 미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특하게 초상화를 그린 비주류 국가의 20세기 아티스트 초상화 작품 100 여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두 섹션 모두 주류 미술계가 이끌었던 근대 미술사 혹은 현대 미술에서 많이 봤던 형태의 그림이 눈을 사로잡는다. 물론 전시장 안내문이 강조하는 것처럼 자세히 보면 분명히 주류 미술계 화가들의 작품과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것은 유사성이다. 이유는 하나이다. 비엔날레에 오는 관객이 가지고 있는 ‘미술’이라는 틀이 이미 ‘서양 미술’이라는 도식(Schema)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는 단 하나이다. ‘우리’도 이런 아티스트가 있었다는/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중남미 국적의, 아시아 국적의, 아프리카 국적의 아티스트이며, 더 나아가 이 ‘우리’는 때로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이고, 트랜스젠더이며, 이민자, 정복당한 부족원이다. 출신성분이 이런 비주류일지라도 결국 세계화된 미술계 주류를 이끄는 유럽, 북미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래서 전시의 ‘우리’가 그들에게는 외국인이 듯 그들도 우리에겐 외국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좋게 바라보면 소외된 대륙의 아티스트들도 주류가 하는 미술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외국인’이자 ‘외국인’이 아니라는 호소가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결국 ‘외국인’을 규정하는 큰 틀, ‘주류 미술’이라는 큰 틀을 흔들지는 못한다. ‘우리도 이런 아티스트가 있다’라는 말은 결국 ‘우리도 당신들이 하는 미술을 한다’는 것이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의 묵시적인 정의(서양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자체의 암묵적인 규칙과 계속 싸우는 과정이 현대 미술을 일정 부분 규정한다면 ‘우리’의 ‘과거’가 현대 미술이 될 수 있는 지도 불분명하다. 어쩌면 이조차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타자화시키는 건 아닐까 ?
아티스트 정체성의 중요성
본 전시는 아티스트 이력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전시에 소개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중요하다. 아티스트가 비주류 국가에 속하거나, 사회적 약자(여성, 퀴어, 유색 인종 혹은 정신적 문제를 겪는 등 소외된 이들)이거나 마지막으로 사회, 정치적인 주제(이민, 인종 차별, 환경 문제 등)를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서양 국가 출신의 작업이라 하더라도 전시되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하다. 정신 질환을 앓은 스위스 아티스트 알로이즈 코르바즈(Aloïse Corbaz)의 작업, 이탈리아 게이 아티스트 필리포 드 피시스(Filippo de Pisis), 퀴어의 삶을 그린 미국 아티스트 루이스 프라티노(Louis Fratino)이나 리즈 콜린스(Liz Collins)의 작업이 그런 예이다.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 아티스트들의 국적은 비유럽 국가이다.
지아르디니의 추상화 섹션이 방금 언급한 첫 번째 부류, 즉 비주류 국가의 아티스트들을 모아 놓았다면 전시된 대다수 아티스트들의 경우는 세 가지 중 몇 가지가 겹친다. 예를 들면 비주류 국가의 여성 아티스트인 경우, 그중 소수 부족 국가의 여성 아티스트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주최 측은 파울라 니쵸(Paula Nicho)와 로자 엘레나 쿠루치치(Rosa Elena Curruchichi)가 마야 부족 출신의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 다른 예로는 비주류 국가의 퀴어 아티스트의 경우가 있다. 인도 아티스트 부펜 크하크하르(Bhupen Khakhar)가 대표적이다. 또는 조세카 모카헤시 야노마미(Joseca Mokahesi Yanomami)나 마를렌 질슨(Marlene Gilson)의 경우처럼 특정 부족 출신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작업을 전시하기도 한다.
작업의 예술적 퀄리티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이유이다. 예술적 앙가쥐망덕분에 선정된 것인가 혹은 특이한 정체성 때문에 뽑힌 건가 ? 아니면 둘 다인가 ? 이 질문은 지아르디니 관의 전시장 한 칸을 할애한 미국 출신의 퀴어 화가 루이스 프라티노의 작품을 보면 더욱 강하게 제기된다. 퀴어의 일상을 그렸기에 ‘외국인’으로 소개될 만한 것인가 ? 아니면 그림이 좋아서 전시에 소개될 만한 것인가? 설사 그의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관객은 이런 질문을 피할 수가 없다. 작품이 놓인 전시 맥락이 작품성을 의심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르세날레관 전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 아티스트들의 천 작업을 보고 똑같이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작업이 좋아서 선정된 것인가? 아니면 천 작업이 여성성과 집단적 정체성을 상징하기 때문인가?’하는 질문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이방인은 없다.
사실 이와 같은 혼란은 정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주제 전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긴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는 너무 과했다. 제목에 따르면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지만 ‘외국인’ 즉, 아티스트의 국적에 초점을 맞추면서 많은 것을 놓친 느낌이다. 프라티노처럼 서양 국가 국적의 아티스트도 참여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참여자는 비서양 국가의 아티스트이다. 다시 말하면 전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방인도 국적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 전시에 외국인은 있을지언정 이방인은 없다. 지아르디니관에서 가졌던 이런 소심한 짐작은 아르세날레관의 ‘어디든 이탈리아인이 있다’를 보며 확신에 가까워졌다. 이 섹션만큼 국적이 중요한 섹션이 없기 때문이다.
아르세날레관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한 전시실 앞에 ‘Nucleo Storico Italians Everywhere’(주요 역사, 어디든 이탈리아인이 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고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면 이탈리아 아티스트들이 외국에서 했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객은 아르세날레관 전시의 서사를 따라 움직이다 갑자기 놀랄 수밖에 없다. ‘어디든 이탈리아인이 있다’는 전시 흐름에서 너무 뜬금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 뒤에 이탈리아 정부의 압력이 있었을까’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한다. 좋게 생각하면 주류 국가 아티스트가 비주류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 왔는지, 예컨대 그들의 오리엔탈리즘 같은 걸 비판적으로 보여주려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어디든 이탈리아인이 있다’가 아니라 ‘어디든 유럽인이 있다’ 전시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 그래서 프랑스, 독일, 영국 아티스트 작업도 선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 아니면 개최국의 홈 어드벤티지인가 ? 비엔날레가 스포츠였었나?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미술계에서 국적이란…
다시 정체성 문제로 돌아와 보면, 사실 현대 미술에서 아티스트가 비주류 국가의 사람이라는 건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선 아티스트가 가난한 나라의 국적이라면 나라의 지원을 받기 힘들다. 가난한 나라는 문화, 예술에 많은 지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제적인 공모전에 지원할 경우에는 그 정체성이 무기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라고 해서 프랑스 아티스트만 뽑는 게 아니고 독일이라고 해서 자국 아티스트만 뽑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전시 기획자들은 다국적 전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여전히 주류 국가의 아티스트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의 고충(높은 경쟁률)이 있다. 결국 비주류 국가의 아티스트들이 알려지지 않는 이유는 자명하다. 아티스트의 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현대 미술판이 서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물며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곳도 서유럽이지 않은가? 게다가 상파울로 비엔날레 보다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더 많은 관심을 받지 않는가 ?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전시 취지는 일정 부분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국적에만 치중했다는, 그래서 작업의 질,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대한 진실성이 의심된다는 문제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