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 ‘Foreigners everywhere’(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중 아르세날레(Arsenale)에서 열리는 전시에는 천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소재를 가리지 않고 쓰는 현대 미술 전시에서 텍스타일이라는 소재를 발견하는 건 특이하지 않다. 올 4월 있었던 아트 파리 2024에서는 ‘Art & Craft’라는 부문을 만들어 수공업 작품들을 선정했는데 텍스타일 작품들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그보다 앞선 3월 파리에서 열렸던 드로잉 아트 페어(Drawing Art fair)에서도 많은 텍스타일 작품이 소개됐다. 이렇듯 현대 미술 전시에서 천이라는 소재를 찾기는 어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장 몇 개에 걸쳐 천 작업이 전시되는 건 이례적이다. 모두 알다시피 현대 미술에서 ‘어떤 재료를 쓰느냐’ 하는 문제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느냐’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그래서 제기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천이라는 재료가 어떤 의미를 지니길래 이번 전시에서 천 작품이 이토록 많은 걸까 ?’ 사실 천이라는 재료만큼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비엔날레 전시의 주제를 현대적으로 표현하기 좋은 재료도 없어 보인다.
우선 천 작업이라는 것 자체가 미술에서는 현대성을 갖는다. 섬유를 만들 때는 손기술이 많이 필요하고 천은 주로 옷을 만들거나 집을 꾸미거나 하는 기능적인 면과 연관된다. 르네상스 이후, 16-17세기에 현재의 예술 개념과 비슷한 예술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수공업은 예술에서 제외되기 시작한다. 그 후 18, 19세기를 거쳐 예술의 무사심함(desinteressement), 무용성이 강조되면서 수공업은 예술에서 아예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리고 현대 미술이 근대 미술의 규준 중 하나인 ‘무사심함’을 공격하면서 텍스타일은 예술이라는 장르에 다시 편입되게 된다. 현대 미술의 기존 예술 개념에 대한 공격은 크게 보면 1917년 뒤샹의 ‘샘’(fontaine) 이후이지만 실제로 널리 행해진 건 60년대 이후로 볼 수 있다. 여전히 예술 밖의 것 특히, 예술에서 외면받아 왔던 것을 미술관 안으로 들여오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텍스타일은 여기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최근 파리에서 열렸던 두 개의 아트 페어, 드로잉 아트 페어와 아트 파리 2024도 이런 노력을 보여준다. 아르세날레에서의 많은 천 작업 전시도 이런 현대 미술 정신의 연장선에 있다. 특히 본 전시에 선보이는 많은 아티스트들의 커리어 시작이 응용 예술이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비엔날레는 현대 미술이 계속해서 고전적인 범주화에 저항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천은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다.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천은 옷을 만들거나 장식하는 재료이며, 대부분의 경우 여성이 담당했던 재료였다. 남성들이 ‘바깥일’을 하는 동안 여성은 집에 남아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라크네라는 여성의 이야기는 천이 가지는 이런 상징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잣기에 자신 있었던 천재 직공 아라크네는 아테나 신과 베 짜기 시합을 해 이기며 이에 대한 벌로 거미로 변한다는 게 신화의 줄거리이다. 베 짜기는 여성에게 할당된 역할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제한된 사회 활동을 했던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외부에 과시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분야였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거미 조각을 설치하면서 ‘엄마’를 기린 건, 아마도 거미에게서 첫 번째 ‘여성’으로서의 엄마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 다시 말하면, 천 자체가 소위 ‘여성성’이라 일컫는 성향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여성성이 속해 있는 사회, 즉 가부장적 사회를 암시하는 재료이다. 이번 본 전시의 제목이 ‘Forigners everywwhere’며 텍스타일 작품을 많이 전시했다는 사실도 남성 위주의 사회, 역사적으로 외국인(이방인)이었던 여성을 표현한다는 걸 함축한다. 실제로 비엔날레 본 전시에서 선보인 대부분의 천 작업을 한 아티스트들은 여성이다. (물론 안토니오 조세 구즈만(Antonio Jose Guzman)처럼 예외도 있다. 그는 이바 잔코비치(Iva Jankovic)와 함께 한 설치 작업 ‘Electric Dub Station’을 전시했다.) 천 작업을 대규모로 전시한다는 건 ‘아직도’ 여성 아티스트가 외면받는 현대 미술계에서 여성 아티스트, 그것도 전형적으로 ‘여성적인 것’을 차용해 작품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천 작업은 아르세날레관의 중앙을 차지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강요당해 왔던 임무, 얼마 되지 않는 사회활동의 수단을 자신들만의 무기, 표현 수단으로 삼아 남성 위주의 사회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들이 짜놓은 판에서 그들의 방식이 아닌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텍스타일로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도 현대 미술의 흐름을 등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다나 아와르타니(Dana Awartani)나 아그네스 와루구루(Wgnes Waruguru)처럼 큰 설치 작업을 하기도 하고 아르피레리스타르 그룹(Arpilleristas, 칠레 아티스트 그룹)처럼 텍스타일 작업을 회화 작품처럼 액자 속에 넣어두거나, 귀네스 테르콜(Güneş Terkol)처럼 사회적, 정치적인 상황을 문제 삼기도 한다. 아티스트들은 조형 언어로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섬유라는 재료는 집단적인 정체성을 나타낸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으로 만든 깃발은 한 국가, 지방을 상징할 뿐 아니라 천을 다루는 방식도 한 독자적인 문화를 나타낸다. 부족마다 옷을 만드는 방식, 옷을 장식하는 방법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으로 어떻게 천을 만들었는지도 집단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방금 언급했듯, 대부분의 집단에서 천은 여성의 재료이지만 동시에 집단, 특히 민족, 부족의 문화를 함축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즉, 천을 재료로 작업을 한다는 건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클라우디아 알라르콘(Claudia Alarcón)은 실래트(Silät – 아르헨티나 위치(Wichi)족 여성으로 이루어진 그룹)와 함께 자기 부족 특유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천(야생 식물 차구아로 만든 섬유)을 사용해 작업을 했고, 북 아마존 아이메니 족 출신인 산티아고 야후아르카니(Santiago Yahuarcani)는 천으로 작업을 하진 않았지만 자기 부족이 천, 캔버스를 만드는 방식으로 즉, 란차마(Llanchama)라는 나무로 캔버스를 만들어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아티스트는 천을 이용해 자신의 집단적 정체성, 이를테면 한 부족의 여성이라는 걸 표현하며, 본 전시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특정 부족 출신의 여성 아티스트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것은 소수 부족이 역사에서 외면 당해왔고 보다 큰 세력에게 지배 당해왔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천으로 작업을 한다는 건 벤야민이 강조했듯 ‘역사는 언제나 지배 권력의 역사였다’는 걸 말하는 동시에 비판적인 관점으로 역사나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표현 방식은 현대 미술에서 조형 언어를 이루는 문법, 법칙 같은 것이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천 작업 중에 한 부족이 소위 말하는 ‘문명국가’에 의해 탄압당하고 정복당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작업은 없지만 그럼에도 천으로 하는 작업이 ‘외국인’인 한 집단(부족, 국가)이 문명국가에 의해 어떻게 타자화되어 정복당하는 지를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이유이다.
아르세날레관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비엔날레 본 전시 제목과 같은 클레르 퐁텐(Claire Fontaine)의 네온 작업 ‘Foreigners everywhere(2024)’가, 그다음에는 우주로 떠나려는 지구인(Yinka Shonibare, Refugee Astronat VIII, 2024)과 마타호 콜렉티프(Mataaho Collective)의 설치 작업 Takapau(2022)이 전시 전반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그 다음 전시실부터가 본 전시의 시작인 셈이며, 여기서 천 작업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천이라는 재료는 미술사적, 사상사적, 역사적, 철학적인 여러 의미가 교차하는 장소 혹은 여러 시간성이 교차하는 곳이다. 이미 천 자체가 외국인, 이방인, 변두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전시의 천 작업이 대놓고 이런 주제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천 작업 주변의 작업들이 오히려 소외된 사람들을 둘러싼 주제, 예를 들면 민족성, 성적 정체성(퀴어, 트렌스 젠더 등), 유색 인종 등의 문제를 더욱 직접적으로 다룬다. 즉, 아르세날레 전시장에서의 천 작업은 사회적, 정치적 변두리를 주제로 다루는 작업들이 뻗어나가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작업이며, 드러내놓고 정치성을 표현하는 작업들이 어색하지 않게 전시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틀의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스토리를 전개하는 전형적인 틀인 기승전결의 흐름을 전시에도 적용해 본다면 천 작업은 본격적으로 이방인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단계인 ‘전’(갈등 고조)으로 관객을 이끄는 ‘승’의 역할을 하는 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