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言]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잠 9:7)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 29:17)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리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 6:1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 18:3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마가 11:2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누가 11:4)
~~~~~~~~~~~~~~~ Bible ~~~~~~~~~~~~~~~
오늘 황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에 깊은 감동과 회개를 하게 된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부모가 자녀를 훈계할 때에 어떻게 용서해 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하셨다. 즉 훈계하는 순간 부모는 어떻게 용서해야지 하는 고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징계와 용서(은혜)를 비추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전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달달 외우고 있었지만,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있었을까 하는 반성 정도는 심중에서 울려났다.
그 울림이 내 심중에서 가만두지 않고 계속 내 영혼에 메아리쳤다. 사실 나도 용서받지 못한 일들이 많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단지 인간의 자존심, 아담이 하나님 앞에 선악의 열매를 먹은 이유를 말할 때에 자신의 자존심이 이렇게 말하게 했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직설적으로 질문하시지 않았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이렇게 물으셨다. 먼저 그에게 일어난 사실을 지적하시고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듯이 물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특히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 훈계를 하는가? 마치 재판관처럼? 또는 절대자처럼?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것이다. 마지 자신이 의인된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보다는 나 자신에서 더 선명하게 비쳤기 때문에 ‘울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한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또는 그렇게 주장하는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함에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존재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 특히 전통성과 명분과 가문을 내세우며 주장하는 사람들, 사극에서 보았던 명분집안이니, 대통을 있는 가문이니 하면서 마치 대단한 존재인양, 대단한 가문인양....... 그런 역사적 이야기에서 닮아가는, 모방하는 자칭 어른이라는 분들은 아랫사람이나 젊은 사람, 특히 어린 사람들에게 훈계하기를 즐긴다. 이러한 의식이 마치 자신들의 교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회적 풍토가 가정에까지 스며들어서는 자녀를 훈계하는 가운데에 자신의 명분을 내세울 때가 많다.
그런데 오늘의 황목사님의 말씀에서 번쩍 뇌를 때리는 울림에서 하나님의 놀라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위에 성경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아무나 훈계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반드시 징계하신 후에는 회복을 이루시계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징계와 용서’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징계하심에는 한 번도 직접 행하신 적은 없으시다. 물론 노아의 홍수 때에는 그러하셨지만, 그것도 그들이 얼마나 문란한 생활을 했는지를 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아 홍수 직전에 사람들의 문란한 생활이 어떠했는지, 소돔과 고모라의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폼페이 섬의 멸망, 로마의 멸망 등등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겠다. 문란한 생활을 하는 그들은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집단적인 범죄인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현대시대에 와서, 특히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시점에 와서 나타는 현상들은 무엇이겠는가? 이미 영국이, 프랑스가, 유럽 전체에 나타나는 동성애 현상들인 것이다. 이런 사악한 인간의 문란함을 합법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노아 홍수 직전의 인간들의 모습을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 후회하신다고 노아에게 말하시고 물로 심판할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노아를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하셨다. 노아는 그런 문란한 생활에 흡수되지 않고 구별된 생활을 하였기에, 그의 현실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물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의 가족들도 함께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들, 결혼한 아들들이었다. 그들도 역시 문란한 생활에 물들지 아니하였기에,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는 못했어도 말이다. 노아로 말미암아 노아의 자녀들도 아내도 구원을 받은 것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노아처럼 살아가야 할 때인 것이다. 결코 악한 세상은, 왕들은 문란한 생활을 더욱 유도하여, 더욱 동성애의 법으로 인간들을 지배하고, 짐승처럼 채찍질하면서 다스릴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황목사님의 말씀, 자녀를 훈계할 때에 먼저 용서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라는 말씀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된다. 물론 그전에도 사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하였지만, 세상에 속한 인간존재로써는 역시 세상적인 이념과 사상에 의해 익숙해진 삶에서 벗어날 수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하기에 일생을 배우며 깨달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 하나님의 징계와 용서에서 무엇을 깨닫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부모가 자녀를 훈계할 때에는 대충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사랑함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거리에서 한 여인이 두 살 된 아이에게 엄하게 꾸짖으면서 나중에 그 아이를 꼭 안아주며, 품어주는 모습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아내인 이브에게 출산의 고통과 함께 아이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셨음 보았다.
천만다행으로, 이 세상이 악할지라도 여전히 세상은 그대로 있음은 바로 이브에게 알게 하신 출산의 고통과 모든 남자들이 여인에게서 나고, 여인의 품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외모)을 가졌으나, 여자는 하나님의 성품(인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은 늘 여자를 학대하고 여성으로 성전환을 하는 모습들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추가-
지금의 미국의 실태를 보면 마치 노아홍수 직전으로 달려가려고 애쓴다고 보게 된다. 제 2의 로마의 멸망을 맞을 것이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입은 미국이 처음 사랑을 버렸기에, 잊었기에 그들은 망령된 방향을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빨던이로써, 해벌레이로써 말이다. 이 시점을 주시해서 볼 때에 하나님의 임재가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이제는 노아처럼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