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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by 박성희

아버지가 집을 나가도 우리의 시간은 흘렀다. 나는 몰라보게 어두워졌고 동생들은 빨리 철이 들었다. 시골 마을의 장점이자 단점은 이 집 소식을 온 동네 사람들이 순식간에 안다는 것이다. 우리를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한 마디씩 아버지의 소식을 물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우리도 모른다고 도대체 아버지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너무 궁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멋쩍게 웃어 보이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잔인하게도 너희 엄마 불쌍하다든지 엄마 말 잘 들으라며 아빠한테 여자 있는 거 아니냐는 둥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앞에서 꺼내놓았다.


엄마는 원래 생활력이 강했지만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로 세 아이를 혼자 키워나가야 했기에 생활력이 더욱 강해졌다. 연락되지 않는 아빠를 미워할 시간도 없었다. 평일에 군부대 조리사 일을 하면서 저녁과 주말에는 식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쉬는 날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셋만의 시간이 더 많아졌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우리 먹을 반찬, 찌개를 대용량으로 해놓고 출근한 엄마는 자정이 다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런 엄말 대신해 나는 내 교복을 빨아 입고, 점심 도시락을 직접 쌌고, 동생들 아침, 저녁을 챙겼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할 일은 해야 했고, 아버지는 우리 곁에 없었다.


엄마는 저녁에 식당일을 하다가 갑자기 집으로 들어와 몰래 우는 모습을 보이는 날도 있었고, 밤늦게 집에서 혼자 자주 술을 마셨다. 젊었던 엄마는 흰머리가 많이 늘었고, 서글서글하고 웃는상이었던 엄마는 웃는 일이 없어졌다.


어느 날은 버스가 자주 없는 시골에서 생활하려니 아버지가 있을 때는 해본 적이 없던 운전을 해야겠다면서 갑자기 운전면허 학원에 다녔다. 그리고 곧 면허를 따더니 50만 원 주고 빨간 티코 자동차를 사 왔다. 그것도 수동이라 산길을 다니며 시동이 꺼진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차선이 하나밖에 없는 어두운 길에서 뒤에서 차가 올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불안하고 어설펐던 엄마의 운전실력은 나날이 늘어났고 우리는 그런 엄마가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아빠가 집을 나가고 2~3년이 흐른 어느 날 엄마가 우리 셋을 불러 앉혔다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아빠를 찾았어............. 엄마가 가서 만나보고 올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 이런 기분일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어쩌면 아버지가 어디서 큰 사고를 당해 신원미상으로 발견되는 일. 혹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일 등등 우리에게 돌아오고 싶었지만 돌아올 수 없는 아주 치명적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차라리 그런 소식이 들린다면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을 텐데. 어쩌면 그런 소식이 들리기를 기다렸다고 말하면 나는 나쁜 딸일까.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어디서? 어디서 찾았어?”

“인천 고모네 집에 있데. 엄마가 가서 만나보고 올 건데...... 엄마는 너희 셋이랑만 살고 싶어. 서류상으로도 이혼하고 싶고, 근데 너희한테 물어봐야 할 거 같아서. 너희가 아빠가 필요하다면...... 엄마가 다시 한번 생각해볼게. 너희 생각은 어때?”



아 그렇지 우리는 아버지가 있었지만, 우리 곁에만 없었던 거였지. 엄마가 우리에게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 당신이 제일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자식들의 아버지라고, 우리의 의견을 물어봐 주셨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본인 상처보다 자식들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엄마가 너무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고장이 난 나를 대신해 둘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없어도 돼.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도 없어도 돼”



나보다 더 어른이 되어있었다. 고작 초등학교 4.5학년인 동생들이 먼저 이야기를 했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건 나뿐이었다. 그래도 정리를 해야만 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해오던 레퍼토리, 꿈에도 몇 번은 나왔던 장면. 당연히 없어도 된다. 지금까지 없었기에. 우리는 그렇게 우리끼리 잘 살아왔기에. 우리는 엄마가 있기에 괜찮다. 엄마에게는 우리가 있기에 괜찮다. 혹여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 남아있었더라도 아버지가 우리에게 오지 않고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있다는 건 우리에게 돌아올 마음이 없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속하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건 없다고.



“나도 당연히 없어도 돼 엄마... 왜 이런 걸 물어...”

“너희한테는 아빤데. 당연히 물어봐야지. 엄마가 그걸 엄마 마음대로 뺐을 수는 없는 거야....”



마음이 너무 아팠다. 펑펑 울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우릴 버린 아버지도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엄마도, 철들어 버린 꼬맹이들도 너무 속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다음날 엄마가 떠났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했다.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엄마가 집을 떠난 순간부터 시간이 더욱더 더디게만 흘렀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나 이렇게 영영 엄마도 우리를 떠나게 된다면 어쩌지. 우리는 고아가 되는 건가. 내가 가장이 되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처음 집을 나가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엄마가 힘들어 보일 때, 그런 생각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우릴 버렸고, 부모가 자식을 버릴 수 있는 거구나. 부모와 자식이 죽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떨어져 지낼 수 있는 거구나. 만약에 엄마도 힘들면 우리를 떠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치를 많이 봤었다. 엄마가 우릴 버릴까 봐.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 했고, 집안일에도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엄마를 힘들지 않게 해야 한다고 수없이 생각했다. 내가 그런다고 엄마가 힘들지 않은 건 아닌데, 그렇게라도 엄마를 안 힘들게 해주고 싶었다.

늘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아버지와 늘 우리 옆에서 챙겨주던 엄마가 없어지는 건 차원이 다르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들과 같이 있을 것이다. 내가 누나고, 우리는 가족이니까. 나한테는 가족이 그런 의미였다. 아버지가 버린 가족이 나한테는 가장 소중한 지켜야만 하는 존재였다.


나의 비장한 각오가 무색하게 며칠 뒤 엄마가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우리는 그렇게 서류상으로도 다섯 명에서 네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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