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희망대학과 희망 학과를 적어오라는 용지를 받았다. 진작부터 나는 마음에 정해놓은 곳이 있었지만 적지 못하고 12시 넘어서 퇴근해서 들어온 엄마에게 쓱 종이를 내밀었다.
“엄마 이거 써가야 하는데... ”
“응. 어디로 쓸 거야?”
“나는.. 문예창작과 가고 싶어”
“...... oo야 네가 엄마 도와줘야 해. 문예창작과는 안돼. 바로 취업할 수 있는 간호과 같은 전문직으로 가자”
“.. 희망이잖아. 희망은 가고 싶은 곳 아니야?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바로 취업할게!”
“안돼. 다시 생각해”
단호했다. 엄마에게 너무 섭섭했다. 며칠을 엄마랑 말도 섞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철없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사는 건 정말 괴로울 거 같았다. 문득 무엇이든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라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를 닮은 것일까?
그리고 엄마에게 미안했다. 이렇게 잠깐 아버지를 떠올리는 거조차 엄마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엄마를 도와야 하는 것 중에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엄마를 돕는 것이 우선순위가 맞는데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타협점으로 생각한 것이 치위생과였다. 전문직이면서도 누군가를 찌르고 피를 보고 살아야 하는 직업(굉장히 존경하지만 무서워서 하는 말입니다)은 아니면서도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전문직이었다. 처음에는 일단 공부하고 취업하고 엄마를 돕다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찾아가야지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 일을 이렇게 14년째 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쳐다보기도 싫었던 외과 쪽 일이 더 적성에 맞을 줄이야.
그렇게 자존심이 상해서 집 근처에 있는 대학도 널렸는데 보란 듯이 멀리 있는 대학교에 지원했다. 합격해서 엄마와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마음인지도 모르고 그랬다. 하늘이 그 마음에 벌을 주려고 했던 걸까. 수원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현실이기에 입학을 준비해야 했다. 수원에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강원도 시골 소녀는 인천이랑 수원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인천 이모 댁에서 통학을 결정했다. 그리고 며칠 뒤 대학교 입학식이 얼마 남지 않아 인천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며칠 전부터 농담으로 동생들에게 엄마 말 잘 들으라며 잔소리도 하고 필요한 큰 짐은 택배로 먼저 보냈다. 주말이었지만 출근한 엄마가 손님 뜸한 시간에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집으로 왔다. 작은 가방을 하나 메고 서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엄마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돈 얼마 안 되는데 갖고 있다가 써. 돈 부족하면 연락하고.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아 알겠어. 내가 애야?”
“엄마가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줄게. 시간 됐다. 나가자”
“누나 잘 가!”
“누나 안녕”
멀리서 짐 싸는 모습을 구경만 하던 동생들이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이제 집을 떠나는 건가. 여기서 19년을 살았는데 도시에 나가서 혼자 잘 지낼 수 있을까. 어디를 갈 때는 항상 엄마, 아버지와 함께 갔었는데 이제는 나 혼자 간다. 엄마의 빨간 티코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늘 내 곁에 있던 엄마, 동생들이었는데 내가 지금 이 길을 나서면 언제 집에 올 수 있는 거지. 버스비도 비싼데 방학에나 올 수 있겠지? 이제 누구랑 장난치고 놀지? 이제 집안일은 누가 하지? 운전하는 엄마의 옆모습을 슬쩍 쳐다봤지만 아무 표정이 없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헤어질 때도 많이 울었고, 섭섭했는데 엄마랑 동생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내 옆에 항상 있어 주던 사람들이니까 보고 싶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니까. 언제든 또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언제든 볼 수 없다. 시간을 내고 버스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와야만 볼 수 있다.
시내 터미널 광장에서 엄마와 아무 말 없이 버스 오는 곳만 쳐다보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멀리 인천행 버스가 들어섰다. 바리바리 싸서 무거워진 내 짐을 버스 짐칸에 넣어 준 엄마가 굳은 얼굴로 얼른 타라고 손짓을 했다.
“가서 전화할게”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라고는 애교도 없이 그 한마디를 끝으로 버스에 냉큼 올라탔다. 버스는 만석이라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내가 앉으면 갈 줄 알았던 엄마는 버스 문 앞에 서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셨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머쓱했는지 애꿎은 땅을 보고 발을 왔다 갔다 하며 내 버스가 떠나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왜 그게 그렇게 슬펐을까.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냥 눈물이 아니고 촌스럽게 엉엉 눈물이 났다. 주말에 식당에서 일하다 말고 사정사정해서 딸내미 인천 가는 거 데려다주고 온다고 앞치마에 슬리퍼 신고 나와서 나를 마중하고 있는 엄마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제대로 고맙다고 말 한마디 하고 올걸, 속만 썩여서 미안하다고, 내가 우는 걸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엄마도 나랑 헤어지는 게 못내 섭섭했던 건지 엄마 얼굴이 너무 어두웠다.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뚝 떨어지는 거처럼 마음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할머니가 놀라셨는지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손에 쥐여주셨다.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한 채 엄마만 바라보며 한참을 펑펑 울었다. 엄마는 그날 내가 우는 걸 보셨을까. 아니면 엄마도 울고 계셨을까. 죄 없는 엄마의 발만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철없는 자식 멀리 보내는 엄마 마음이 어땠을까. 아직 자식이 없는 나는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한 명, 한 명, 떠나보내는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우고 사셨을까. 시골 마을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뜸해지는 연락, 발길에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자식이란 무엇이길래 곁에 있으면 챙겨야 하고 안 보이면 보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