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자서전 쓰기 프로젝트
자서전의 연보와 연표를 작성하고, 목차를 구성하고 나면 대략적으로 자서전의 방향성이 잡힌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서전 쓰기에 돌입해 보자. 그런데 무작정 자서전을 쓰려고 하면 몇 줄 끄적이면 막히고 만다. 언제 태어났고, 어린 시절 기억 몇 가지를 떠올리고 나면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다. 이럴 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자서전을 썼는지를 보면 도움이 된다. 출간된 자서전이 많으니 여러 자서전을 찾아서 먼저 읽어보기 바란다.
하나만에서는 <백범일지>를 참고로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청소년이 읽기 쉽게 쓴 요약본보다 한자어가 많아도 김구선생이 쓴 자서전 원본 그대로 읽기를 권한다. 작가의 글투와 서술 방식, 그 시절 언어와 풍속, 시대적 상황과 문화, 일상생활 등을 그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나 가계도, 물건의 명사 등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으나 자서전 쓰기에 도움을 받으려면 원본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 맛도 원본이 훨씬 생생하고 재미있다.
백범 김구선생의 어린 시절
김구선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백범일지의 첫 장에는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고 있는데 목차는 1) 조상과 가정/ 가계도 2) 난산의 개구쟁이 3) 궁핍한 배움의 길 세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구선생은 안동 김 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조선 중기 방조 김자점이 반역죄를 저질러 전 가족이 멸문의 화를 당할 때 경기도 고양군으로 망명하였다가 황해도로 옮겼다. 가문은 멸문을 면하기 위해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노릇을 하였다. 황해도 해주 텃골은 토착 양반인 진주 강 씨와 덕수 이 씨 등이 있었는데 토착 양반들로부터 천대와 압제를 받았다. 아버지가 열일곱에 아이를 얻었으며 어머니의 젖이 부족하여 암죽을 끓여 먹고 이웃집 산모에게 젖을 구하였다. 어린 백범은 개구쟁이였다. 이웃집 아이가 자신을 놀리고 매질하니 이웃집 아이를 죽이겠다며 칼을 들고 가기도 하고,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 바꿔 먹기도 했으며, 떡을 사 먹으려고 아버지 돈을 훔치기도 했다.
아버지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자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은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했다. 아버지의 형제는 네 명이었는데 모두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농군이었다. 아버지는 술에는 한량이 없고 취하면 양반 강. 이 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도 여러 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었다.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지를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아버지가 사람을 잘 때렸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이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다. 막내 삼촌도 술버릇이 나빠 할아버지 장례식 때 장례일을 돌보는 사람을 두들겨 패고 양반들이 보내 준 노복도 쫓아버렸다. 어머니는 김구선생은 술을 절대 먹지 말라고 일렀다. 아버지는 면단위 실무자인 도존위에 천거되었으나 때리는 술버릇 때문에 3년 만에 면직되었다. 아버지는 질병으로 전신불수가 되어 가산을 탕진했고, 다소 호전되었으나 반신불수가 되니 부모님은 문전걸식으로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녔다.
백범은 아버지가 총대우(양반이 쓰는 갓)를 쓰고 나갔다가 이웃 동네 양반에게 발각되어 관이 찢기고 못쓰게 되는 일과 동네에서 누구는 양반이고 누구는 상놈인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지사에 급제하면 양반이 된다는 말을 듣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 열두 살에 아버지가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모아 양반의 선생으로는 고용하지 않는 이생원을 '상놈의 선생'으로 모셨다. 백범은 새벽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선생님 방에 가서 글을 배우고 동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매달 보는 시험에서 일등을 하기도 한다. 열네 살 때 부모님은 아버지 병환이 회복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만나는 선생들은 어린 소견으로도 대개 고루했다. 아버지는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며 실용문서에 주력하라고 하였다. 백범의 한문실력은 겨우 몇 줄 엮는 정도였으나 무식한 문중에서는 장래 존위 자격이 있다며 촉망하였다. 본인은 통감, 사략 등 역사서를 읽을 때 어깨가 들썩거렸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빈한한 가정형편과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못되었다. 아버지는 큰어머니와 재종 남매간인 정문재 씨에게 부탁하여 면비 학동으로 입학시켰다. 백범은 정문재 씨에게 시, 대학, 통감등을 배웠다.
민족의 지도자로 근엄한 모습만 보다 어린 김구선생을 만나니 그냥 어린아이를 만나는 듯하고,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릴 때 읽던 위인전에는 걸출한 영웅은 태몽부터 남다르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글을 읽히고 시를 짓고 장원 급제를 하며, 뛰어난 학문적 성취와 훌륭한 인품을 타고난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김구선생의 자서전은 사뭇 다르다. 조상이 상놈인 것, 아버지가 술꾼이었던 것, 학문 수준도 특출 나지 않았던 것 등을 솔직하게 기록하였다. 훗날 어떤 청년으로 변모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을까 궁금증이 인다.
자서전 출생부터 유아기까지 쓰기
<백범일지>를 읽고 나면 자서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대략적인 감이 잡힌다. 학습 중에서 가장 좋은 학습은 모방이다. 이제는 <백범일지>를 따라서 자서전을 써보자. 무엇이든 무조건 끄적이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때는 바야흐로 1970년 3월 1일, 산천은 눈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시절이다. 전라북도에 몇 가구 살지 않는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주먹만큼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 진주(진양)하씨 사직공파 33대손으로 부모님은 농사꾼이었다.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아들 다섯을 채우려고 아이를 낳았다. 농사일을 막 시작한 3월 초라 부모님은 바쁘셨다. 아이를 낳고 삼일 만에 일을 나간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거품을 물고 있어 곧 죽을 줄 알았다. 다행히 살아난 아이는 키가 작고 왜소했지만 건강하게 자랐다.
아이의 형제 중 맏이 었던 큰언니는 스무 살이었다. 큰 언니는 부모님이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아서 서울로 도망갔는데 막내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창피하던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지만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장녀들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집으로 돌아온 큰 언니는 아래로 여섯 동생을 돌봤고 집안일을 도맡았다. 솜씨가 좋고 손끝이 정갈했던 언니는 온 집안을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만들었다. 언니가 만든 음식은 맛깔스럽고 입안에 척척 안겼다. 언니가 해준 음식 중 밀가루 반죽을 하여 솥뚜껑에 구워낸 개떡을 잊을 수가 없다.
큰언니는 탁아소 선생님이었다. 아이는 큰언니를 따라가서 율동도 배우고 노래도 배웠다. 손뼉 치고 노래하며 춤을 추는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큰 동네 재각집에 울려 퍼졌다. 아이는 큰언니가 마루를 청소할 때는 언니 등을 타고 놀았다. 아이는 엄마대신이었던 큰언니 덕분에 늘 깔끔하고 맵시 있는 옷을 입었고 단정한 차림을 할 수 있었다. 큰언니 친구 덕도 보았다. 어느 날, 아이는 동네 언니들을 따라 냇가로 다슬기를 잡으러 갔다. 해 질 녘이 되어가는데 언니들은 집에 갈 생각을 안 했다. 아이는 혼자라도 집에 가려고 둑을 넘다가 미끄러져서 냇물에 떠내려갔다. 길을 지나가던 큰언니 친구들이 아이를 구해서 업고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이가 다섯 살 때 큰언니가 시집을 갔다. 시골집 마당에 병풍을 치고 부엌이며 마당 여기저기에서 동네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장만하였다. 대례복을 입은 언니와 형부가 맞절을 했고 덩달아 온 집안에 풍악이 넘쳐흘렀다. 큰오빠와 동네 청년들이 형부를 매달아 발바닥을 때리기도 했다. 아이는 정성으로 돌봐주던 언니가 시집가는데 어머니만 찾으며 울었다. 유아기 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일곱 살까지 어머니 젖을 만지고 잤던 일, 매운 김치를 어머니 입으로 고춧가루를 빨아서 밥 위에 놓아주던 일뿐이다. 그럼에도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제일이었나 보다.
큰언니가 시집을 가고 여섯 살 때 아이가 처음 밥을 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는 날이었다.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쌀을 씻어서 가마솥에 안치고 손등까지 물이 오도록 하여 불을 때서 밥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크게 칭찬을 해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이가 밥을 할 일이 아니고 어른인 아버지가 밥을 해서 아이를 챙겨야 했었다.
다섯 살 때 옆집 친구 영숙이가 이사 왔다. 둘은 집 앞 골목길 돌담 밑에서 놀았다. 올망졸망한 아이 둘이 쭈그려 앉아서 해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친구 영숙이는 다섯 살 이후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아이는 언니 오빠들 덕분에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어깨 너머로 일찌감치 숫자를 익히고 한글을 뗐다. 하루라도 빨리 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부모님은 학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친구 영숙이가 학교 갈 때 영숙이 어머니를 따라 입학했다. 영숙이는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늘 울고 다녔고, 영숙이 어머니는 영숙이를 업고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이는 학교 가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자서전 한꼭지를 쓰고 난 후
keep going
자서전을 쓰기 위해 조상을 알아보고 족보를 찾아보았다. 가족 톡방에도 시조, 파, 몇 대손 인지 등을 물어보았다. 형제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위키백과에서 조상의 업적을 확인했다. 큰 올케가 족보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전자족보도서관에는 종친회 홈페이지가 있어서 잊고 있던 조상의 뿌리를 찾아보았다. 나중에 족보 박물관이나 종친회에 방문해서 확인해도 좋을 것 같다. 조상의 족보를 찾아보고 가족에게 물어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뿌리, 전통과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옛날 어릴 때 간간이 아버지께서 족보를 펼쳐놓고 시조와 조상 중 업적을 남기신 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곤 했던 일도 기억도 난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다시 물어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어머니 족보는 찾아볼 생각을 미처 못했는데 나중에라도 알아보기로 했다. 남편 가계도도 더 늦기 전에 확인해야겠다. 시아버지가 계실 때 시댁 족보도 보고 말씀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선은 가지고 있는 자료 한도 내에서 출생부터 유아기까지 자서전을 썼다.
자서전을 쓰기 전에 출생과 관련해서 들었던 이야기와 유아기를 떠올리니 많지는 않지만 드문드문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일들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서 쓰기 시작하니 한 번에 후루룩 자서전의 한 꼭지가 쓰여졌다. 자서전을 쓰면서 과거와는 생각이 달라진 점도 있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두고 일을 하러 가셨을 때 혼자 울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며 마음 아팠다. 이번에는 몸을 푼 지 삼일 만에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했다. 일곱을 낳고 제대로 몸을 돌본적이 한 번도 없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사십 세의 어머니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어졌다. 자서전 첫 꼭지를 쓰면서 똑같은 사건이지만 새로운 생각과 또 다른 관점을 갖게 된 것은 작은 소득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너무 막연해서 자서전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한 꼭지를 쓰고 나니 천천히 가다 보면 자서전이 쓰이겠구나 여겨진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면 되겠지. keep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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