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자서전 쓰기 프로젝트
아이는 어깨너머로 한글을 배웠고 나이도 차기 전에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서 친구 어머니를 따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는 학교에 일찍 가고 싶었지만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라는 더 넓어진 놀이터쯤으로 여겼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을 뿐이다.
<들판 한가운데에 초등학교가 있다>
학교는 여섯 개 마을을 사방에 두고 너른 벌판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본관 건물은 동서로 길게 서있고, 건물 앞에는 중앙에 국기게양대와 조회대가 있었다. 화단에는 이승복 어린이, 이순신장군, 세종대왕, 사자 호랑이 상이 있었다. 학교 본관 건물 옆에는 도서관과 실험실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는 수업시간 이외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본관 건물 뒤에는 선생님의 숙직실과 푸세식 화장실이 있고, 아름드리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토끼장도 있어서 쉬는 시간에는 토끼에게 풀을 뜯어다 밥을 주곤 했다.
운동장은 어른이 되어서 보니 작기만 했으나 아이의 눈에는 크고 넓어서 한 시선으로 다 담을 수 없었다. 운동장 우측에는 시소며 그네, 뱅뱅이 등 놀이터가 있었고 좌측에는 철봉이 있었다. 동쪽으로 교문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서쪽 개구멍으로 드나들곤 했다. 울타리는 잣나무 울타리와 탱자나무가 있었다. 교문 바로 우측으로는 숲이 우거진 일명 '숲속교실'이라 부르는 야외 교실이 있었다. 숲속교실에는 칠판과 시멘트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숲속교실에서는 미술 시간에 찰흙 만들기, 그림 그리기 등과 가끔 음악 수업도 있었다. 방과 후에는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을 때는 숲속교실 시멘트 책상을 뛰어넘으며 외우기도 했다. 숲속교실 옆으로는 논에 물을 대는 수로로 이용되는 시냇물이 흘렀다. 학교 주변으로는 너른 들판이 있어서 오가면서 농촌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고 진입로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어 노란 들판과 잘 어울렸다.
<초등학교 친구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친구라고 해봐야 옆집에 사는 영숙이가 전부였지만 학교에 입학하니 친구가 사십여 명이나 생겼다. 남학생 열한 명 여학생 삼십오 명이었다. 남학생은 숫적으로 열세여서 늘 여학생에 눌려 지냈다. 학교는 크지 않았고 한 학년에 한 반씩 오십여 명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육 학년 졸업할 때까지 같은 반이었다. 유아기 때에 비해서 넓어진 친구관계는 아이의 세상을 확장했다.
친구들은 서로의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이고 언니 오빠 동생은 누구인지 다 알았다. 아이의 언니 오빠는 몇몇 친구의 언니 오빠 형 누나의 친구이기도 했고, 또 몇몇 친구는 친척이기도 했다. 친구의 어머니 아버지는 대부분 농사를 지었지만 몇몇은 면사무소, 기차역, 우체국, 경찰서 등에서 일하는 분도 계셨다. 친구들의 논밭은 얼마나 되며 그 집 살림살이는 어느 정도인지, 숟가락은 몇 개인지까지 알 정도로 가정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았다. 친구들은 가끔 다투기는 했지만 가정사를 자세히 알면서 서로 내색하지 않았고 알은 채도 안 했으며 누구를 괴롭히거나 왕따 시키는 일도 없었다.
<그때 그 선생님은 왜 그랬을까>
아이는 선생님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일 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이 드신 분으로 보건(양호) 선생님 역할도 담당했다. 선생님은 똘똘한 몇몇 친구와 반장 친구에게 선생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떠드는 사람이나 청소를 잘 못하는 사람, 숙제를 안 해온 사람을 때리는 권한을 주었다. 아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친구에게 자주 맞았다.
교실이 나무 바닥이었는데 초를 칠해서 병으로 문질러 반질거리게 만드는 청소를 했다. 나라가 정책적으로 흰쌀밥대신 잡곡밥을 권장했는데 학교에서는 잡곡밥을 싸 오는지 매일 검사했다. 이가 많고 기생충이 성행하던 시절이라 기생충 검사로 채변검사도 했고 몸에 때 검사도 자주 했다. 잘 씻지 않던 아이는 검사가 있는 날에는 수건에 물을 묻혀서 몸을 박박 문지르곤 했으며, 겨울철 잘 씻지 못하는 날에는 하얗게 일어나는 몸뚱이와 쩍쩍 갈라 지는 손등을 감출길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이학년 담임선생님은 예뻐하던 아이들에게 흰머리를 뽑으라고 시켰으며 삼 학년 때 선생님은 아이들이 다 베껴쓰기도 전에 칠판 가득 판서를 하고 지워버려서 빠르게 글씨를 쓰느라 아이의 글씨체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선생님 때문에 글씨체가 나빠졌다고 투덜거렸는데 친구 중 은정이는 글씨를 잘 써서 항상 학급회의 서기를 하곤 했다. 아이는 은정이를 보면 본인의 글씨체가 좋지 않은 것이 꼭 선생님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중에 생각했다.
아이 눈에는 선생님들이 예뻐하는 아이는 항상 따로 있었다. 그 친구들은 선생님과 허물이 없고 친했으며 친구들은 집은 학교에서 가까웠다. 선생님은 친구들에게 김치며 반찬 등 필요한 것을 집에서 가져오게도 했다. 예쁨 받는 친구들은 공부도 잘했고 똑똑하고 야무졌다. 아이는 선생님과는 항상 거리를 두며 지냈고, 선생님이 어렵기만 했다. 솜씨가 좋지도 않은 어머니를 둔지라 선생님께 무엇을 갖다 줄 수도 없었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이라도 한다고 하면 숨고 싶었고, 길가에서 어머니를 만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피하려고 했다. 아이는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고 발표를 잘하지도 않았으며 숙제를 충실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 학년 때 아이는 상을 받고 싶어서 여름방학 숙제인 탐구생활을 착실하게 풀었고, 일기를 매일 썼다. 일기를 매일 쓰면 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방학 내내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라는 것이 보잘것없었다. 예를 들면 안방에 있던 자개장롱의 화병을 보고 그림을 그려놓고 오늘은 장롱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쓰고는 끝이었다. 어린아이의 수가 적중하여 방학숙제 상을 타기도 했으나 이후 고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상을 타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생이 갖는 비판의식과 성장하기>
아이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보다는 선생님에 대한 비판 의식만 늘어났다. 오 학년이 되었을 때는 절정에 달콤했는데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반 전체가 선생님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찼다. 특히 여학생들 사이에 선생님이 아이들을 차별한다는 생각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도 알게 되었고 어느 날은 아이들에게 불만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더니 나와서 자기를 때리라고 하셨다. 아이도 손을 들었다. 몇몇 아이들은 직접 선생님을 때리기도 했다. 아이는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선생님을 때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뒤늦게 반성했다.
아이는 저학년 때는 숙제를 하지 않아서 벌로 토끼뜀을 하기도 하고, 엎드려뻗쳐도 했으며,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서 남아서 공부하기도 했다. 육 학년이 되어서야 공부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 번도 상을 타지 못하다가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력상(우수상 아래)을 받았다. 통신표에는 언제나 '항상 밝고 명랑하며'라는 문구만 쓰여 있었는데 새로운 단어가 쓰였다. 정확한 단어는 기억이 안 나는데 '노력하여 성과를 거둔다'라는 의미의 새로운 내용이었다.(40여 년 전의 통신표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통신표를 떼 보기로 했다.)
<고사리 같은 손이라도 빌려야 했던 농사일>
농촌에서 자란 아이는 저학년 때는 모내기철에는 모줄을 잡아주거나 새참을 날랐고, 논에서 모를 옮겨주느라 거머리가 발을 물어서 피를 보기도 했다. 고추 따기, 고구마 감자 캐기, 나물 뜯기, 밤 줍기, 감 따기, 배추밭과 무 밭 물 주기 등 손으로 할 수 있는 농사일도 도왔다.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농사일에 참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모심기, 벼 베기, 소죽 끓이기, 소 꼴베기, 땔감 하기 등 난이도가 높아졌다.
학교에서도 농사일에 참여했는데 저학년 때는 토끼풀을 뜯어서 토끼를 키우는 활동을 했고 고학년 때는 모내기와 벼베기에 동원되었다. 아이는 집에서 달련된 솜씨로 친구들 내에서도 제법 농사일을 잘했다. 가을에는 겨울에 땔감을 하러 산으로 갔다. 오륙 학년쯤 조개탄이 나왔지만 죽은 삭정이며 나뭇가지는 불을 피우기 위한 좋은 연료였다. 양은 도시락을 난로에 올려놓으면 고소한 누룽지 눌는 냄새가 교실에 퍼졌다. 난로 주위에 모여든 아이들은 도시락을 위아래로 바꿔놓으며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학교에 등교할 때는 마을 공터에 모여서 아이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을 깃발을 앞세우고 두세 줄로 줄을 맞춰 서서 논길을 따라 걸어서 학교로 이동했다. 아침 등교시간이 되면 여섯 마을의 아이들이 비슷한 시간에 등교하는 모습이 시골 들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학교를 가지 않는 일요일에는 동네 스피커에서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졌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동네 아이들이 빗자루를 들고 집 앞 골목을 쓸고 호미를 가지고 나와서 풀을 뽑았다. 아이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동네를 청소했다.
<그때 그 시절 캔디>
저녁에는 동네 꼬마들이 모두 공터와 감나무밭에 모여서 오징어 잡기, 공기놀이, 술래잡기, 그네 띄기 등을 하며 놀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고 주말연속극이 시작되는 밤 여덟 시가 되면 텔레비전이 있는 초가집 아주머니 집에 들어갔다. 십여 명의 아이들이 마루에 길게 두세 줄로 앉아서 올망졸망한 눈으로 연속극을 보곤 했다. 어릴 때 많이 보았던 연속극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그것을 보려고 주말을 기다렸다.
일요일 아침에 보았던 만화영화 '캔디'는 최고로 인기가 있었다. 캔디는 우리 집에도 텔러비전이 생겨서 집에서 보았다. 캔디와 앤소니의 사랑, 금발머리 휘날리는 테리우스. 테리우스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아이는 앤소니를 좋아했다. 캔디는 구박을 많이 받았지만 구김살이 없고 밝고 명랑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노래는 가끔 속상한 일을 겪는 아이의 마음도 위로해 주었다.
노는 걸 좋아했던 아이는 공기놀이, 줄넘기, 고무줄 치기 뿐 아니라 말뚝박기, 잣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팽이 돌리기 등 남자아이들과도 어울려 곧잘 했다. 일이학년때만 해도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중학년 이상 되어서는 중간정도는 되었고, 남자아이와 팔씨름에서 이길 정도로 힘도 있었다. 냇가에서 수영하기, 겨울철 썰매 만들어서 물 댄 논에서 썰매 타기, 비탈길에서 비료포대 썰매 타기 등을 하느라 하루해가 넘어가는 줄을 몰랐다. 아이는 똑 단발에 고무신을 신고 꾀죄죄한 모습에 선머슴처럼 놀았다. 시집간 큰언니가 집에 왔을 때 아이 목욕을 시키면서 "까마귀가 아가씨 아가씨 하겠네."라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동네 어귀에서 아이들과 신나게 열을 올리며 놀고 있을 때 이 판만 하면 다 이길 수 있는 순간에 어머니가 불렀다. "민영아~~~ 민영아~~~" 몇 가구 살지 않는 마을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너무 아쉽고 조금은 속상한 시간이었지만 하던 놀이를 중단하고 집으로 가야 했다. 수도가 아니라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밥을 하고 청소를 하던 시절이라 밥 먹을 때쯤에는 주전자에 물을 떠 오고 마루를 훔치고 때로는 상을 놓고 밥상을 차려야 했다.
어머니는 아이의 놀이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가 집안일을 돕는 것이 당연했고 당신이 시키는 일은 그 즉시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굼뜨거나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썩을 xxx' 욕지거리와 지청구를 날리며 화를 냈다. 가끔 아이가 스스로 청소하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청소 좀 해라"라고 말하면 아이도 짜증이 났다. 어머니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작은 고사리 같은 손이라도 빌려 써야 농촌 살이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보통 장정 서너 명의 몫을 해냈던 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일도 곧잘 하셨지만 몰골이 추레하고 욕도 잘하며 다른 사람과 싸움도 잘했다. 어머니의 모습은 늘 농사일로 바빴고 의복은 볼품없었으며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일은 장정처럼 잘하셨지만 음식솜씨는 별로였고 손재주도 없었다. 할 일은 많고 고됐으며 가르쳐야 할 자식은 줄줄이 많았고 돈은 끝도 없이 들어갔다. 한 푼이라도 벌고 아껴 써야 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몸을 치장하거나 꾸밀 줄을 몰랐다. 어머니는 아이가 저학년 때 소풍 몇 번과 운동회 몇 번 아이를 따라 참여했으나 나중에는 잊어버리거나 농사일에 때문에 학교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기차를 탈 때는 무임승차를 했고 아이에게 주전부리를 사주는 일은 없었다. 시장에서 장을 볼 때는 항상 볼품없고 맛도 없는 허드레 거리로 사 오셨고, 가끔 사 오는 신발이나 옷은 너무 컸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같이 하시기는 했으나 몸이 약한 편이어서 잘하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점잖은 선비 같은 분이었지만 돈을 버는 일은 잘 못하셨다. 큰오빠가 원양어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가 돈을 보내주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히어로 언니와 현실남매>
아이의 언니오빠는 대부분 전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시골에는 바로 위에 오빠와 아이만 부모님과 생활했다. 주말이면 전주에서 기차를 타고 언니 오빠들이 집에 오곤 했다. 아이는 특히 둘째 언니를 좋아했다. 둘째 언니는 아이에게 늘 따뜻했고 무조건 예뻐해 주었다. 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칭찬과 격려, 아름다운 언어였고, 언니가 해주는 음식은 맛있고 군침이 돌았으며, 언니가 깎아주는 머리는 너무 짧지도 않게 알맞게 가지런했다. 어머니가 시키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언니가 집에 오는 주말이면 방과 마루를 깨끗하게 닦고 마당도 티끌하나 없이 쓸었다. 언니에게 칭찬 듣는 것이 좋아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했다. 방학 때면 자취하는 언니를 찾아가서 전주 도시 구경을 했고, 기차 타고 오며 가며 사주는 귤이며 계란을 맛있게 먹었다.
아이는 바로 위에 넷째 오빠와 같이 지내는 일이 많았는데 둘은 그야말로 현실 남매였다. 오빠가 동생을 실실 건들고 약 올려서 울리고 서로 싸우는 일이 잦았다. 울고불고 바락바락 대들며 오빠와 싸우기가 일상이었다. '그렇게 싸울 거면 둘이 떨어져 있어라'라고 어른들이 말해도 둘은 꼭꼭 붙어 있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오빠를 오빠라 부르지 않고 '야, 자'먹었다.
<초등학생의 꿈>
아이의 어릴 때 첫 꿈은 검사나 판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착하고 똑똑하다며 검사나 판사가 되라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아이의 어떤 점을 보아 그런 바람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똑똑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아이는 어머니의 바람 때문인지 판사가 되어 나쁜 사람은 혼내주고 벌을 주며,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꿈은 운동선수였다. 어른 자전거를 초 일때 배울 정도로 운동 감각이 있었다. 노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늘 밖으로 돌았다. 학교 운동장 철봉에서 자주 놀았는데 원숭이처럼 오르락 내리락을 잘했다. 철봉에 매달려 뺑뺑이를 돌고, 높이 올라가 운동장을 내려다보거나 거꾸로 매달려 하늘을 보기도 했다. 수영, 줄넘기, 고무줄 치기, 공기놀이 등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달리기 빼고. 달리기는 친구 영란이가 제일이었다. 영란이가 계주선수로 뛸 때 영란이가 백군이면 백군이 이겼고 청군이면 청군이 이겼다. 아이는 한 번은 높이뛰기 선수로 선발되어 학교 대표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운동회 때 학교에 와서는 '우리 딸, 운동 안 시킨다'며 선생님께 화를 내고 야단을 쳐서 좌절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떠오르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A4용지로 예닐곱 페이지가 될 정도였어요. 생각나는 대로 무작정 쓰고 기록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초등학교 회상하기 하면서 자서전 쓰기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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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모습은 초등학교와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