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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중학교 시절

함께 자서전 쓰기 프로젝

by 하민영

초등학교 입학할 때만 해도 맨 앞줄에 섰던 아이가 자라 다른 아이들과 견줄 만큼 키도 크고 야물어졌다. 시골 작은 촌동네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지내던 아이는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라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갔다. 생각도 제법 여물어서 놀기만 하던 아이가 공부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지,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등을 생각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갔다.


<환경이 달라졌어요>


소녀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만 있고, 사십여 명이 입학부터 졸업까지 같은 반이었다. 중학교는 면소재지에 있었는데 초등학교와는 많이 달랐다. 여섯 개 면소재지의 학생들이 입학했는데 한 학년이 여섯 반으로 한 반에 육십여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초등학교 여자 친구들 중 몇 명이 같은 반이어서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다.


남학생 세반 여학생 세반으로 나뉘어 있었고 학교에서 남학생과 서로 교류하는 일은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남학생과는 내외를 하기 시작했고, 중학교 때는 더 심해졌다. 반장들은 학생회에서 만나기도 했으나 소녀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므로 기회는 없었다. 또 어떤 아이들은 교회나 다른 활동을 통해서 남학생과 만남이 자연스러웠으나 소녀는 영 어색하기만 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초등 여자애들과 떼를 지어 만나고 초등 남자애들 집을 찾아가서 놀기도 했으나 몇 번 어울려 보니 남학생들과는 할 이야기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곧 시들해졌다. 중학교 때부터는 초등 친구들보다는 새로 사귄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걸렸다. 버스를 타려면 집에서 큰 도로까지 십여분 이상을 걸어야 했고, 십 분 정도 차를 타고 가서 내리면 학교까지 이십여분은 걸어야 했다. 기차를 탈 수도 있었는데 버스에 비해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만 운행되어 자율학습을 하던 중학교 삼 학년 때에만 이용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는데 삼십여분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자전거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막내오빠가 타지 않을 때만 이용할 수 있었다.



<소녀가 달라졌어요>


소녀가 초등학생일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공부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긴 것이다. 놀기만 하던 아이가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니 공부를 하게 되고, 하다 보니 재미있어졌고 결과도 좋았다. 공부를 잘하니 친구들에게 관심도 받고 선생님으로부터도 소소한 칭찬과 애정 어린 시선도 받게 되었다. 부모님은 좋은 성적표를 보며 무척 좋아하셨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셨다. 노력한 만큼 이룬 좋은 성적은 소녀가 저절로 공부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공부하는 목표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시골에서 벗어나 도시로 진학하고 싶었다. 도시에 대한 로망은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언니와 오빠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습득되었으며,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던 80년대의 사회적 영향도 있었다.

부모님은 당신들은 못 배웠지만 자녀 교육열이 높았다. 맹모 삼천지교라고 해야 할지 조기 교육이라고 해야 할지, 오빠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부터 도시로 전학을 시킬 정도였다. 딸은 공부를 안 시키는 부모도 있었으나 소녀의 부모님은 어떻게든 가르치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못 배운 설움을 주지 않겠다며 딸자식도 대학까지 가르치겠다고 다짐했다.

공부를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농사일을 안 하고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였다. 부모님은 공부한다고 하면 농사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는 주말에도 공부한다고 말하고 학교로 내뺐다. 소녀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곁에 있으면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어머니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와 멀어지려면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나가야 했다.


소녀는 수학을 제일 좋아했다. 소녀가 좋아했던 작은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고 수학선생님이 되었다. 언니를 좋아하니 수학도 좋아하게 되었다. 수학을 잘해서 언니에게 칭찬받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이 좋았다. 시작은 언니의 영향이었는데 답이 딱딱 떨어지는 수학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맨날 수학문제만 풀었다. 친구들은 나중에 수학선생님이 될 줄 알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중학교 일 학년부터 배우기 시작한 영어도 재미있었다. 영어선생님은 본교가 모교라서 학생들에게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학생들을 어떻게든 잘 가르치려고 했다. 영어 학습방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교과서를 무조건 외우도록 했다. 선생님의 열정이 지나쳐 채벌도 많이 했다. 숙제를 안 해오면 엎드려뻗쳐나 책상 위에 올라가서 손들고 있거나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 매 수업이 벌 받는 아이들의 곡소리로 가득 찼다. 소녀는 벌 받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숙제를 빠뜨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영어선생님의 정성에 감사했으나 훗날 생각하니 채벌과 강제적인 방식보다는 자유롭고 재밌는 방식이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중학교 3학년때는 이른 아침에서 늦은 저녁까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했다. 초등학교 친구 여러 명이 자율학습을 신청해서 기차로 등하교를 했다. 아침 6시 기차를 타면 학교에 6시 반쯤 도착했고, 저녁에는 9시 기차를 타고 하교를 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기차가 떠나버린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깜박 잠들어서 못 깨웠다고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 들고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갔다. 도로를 따라가는 길은 산이며 논밭에 어둠이 가시지 않았고 어스름하였다. 한 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소녀보다 늦게 등교를 했다. 그때서야 알았다. 늦게 온 것이 아니라 너무 일찍 일어나서 시간을 잘못 본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운동은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밖으로 나가 놀던 활동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체육시간도 싫고, 바깥 놀이에도 흥미를 잃었다. 친구들 중에는 오수 축제인 원동산 축제나 남원 춘향제에 가서 노는 애들도 있었지만 소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 유행한 핫도그 집이나 빵집에 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는 노는 애들이나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국어시간에 생각을 키워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국어선생님이었는데 토론과 발표 수업을 많이 했다. 소녀는 많이 활발해져서 발표와 토론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흥부와 놀부, 남과 여 찬반 토론이 있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놀부 입장을 옹호했고, 남자의 입장에서 토론을 했다. 소녀는 다른 친구들이 의견을 내지 않은 흥부 입장과 여자 입장을 적극 대변했다. 흥부입장은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여자 입장에서는 마지막 반론으로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지배한다'라고 말했다. 소녀가 정말 흥부나 여자가 좋아서였다기 보다는 친구들이 모두 놀부와 남자 입장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 같아 반대 입장에서 토론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여름방학 생활 발표 때는 큰오빠가 선보는 과정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오빠는 원양어선을 타다가 결혼을 위해 집에 있게 되었고, 결혼을 하면 더 이상 배는 타지 않기로 했다. 당시 오빠가 여자들과 선을 보고 집에도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키가 작은 여성분이 10cm는 되는 뾰족구두를 신고 왔었다. 중학교 이학년이 보는 오빠의 선은 희한하였고, 여성들의 모습도 희극적으로 비쳤던 것 같다. 몇 페이지를 글로 써서 친구들 앞에서 발표했는데 아주 재미있게 발표를 했다.


꿈에 대해서 발표하는 시간도 있었다. 초등 동창이었던 미영이는 자기의 꿈은 교사라며 왜 교사가 되고 싶은지 정확히 밝혔다. 그리고 미영이는 정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소녀는 두 가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졌던 법조인의 꿈과 과학자의 꿈이었다. 판사가 되어 나쁜 놈은 벌하고 착한 사람은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과학자의 꿈은 과학자가 되어 우리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과학자의 꿈은 당시에 존경하던 영어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선생님께서는 공부 잘하는 사람은 다 검사 판사가 되려고 하는데 과학자가 많아야 우리나라가 발전한다고 했다. 그래서 판사를 꿈을 꾸면서도 과학자가 되어 우리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중학교 소녀의 꿈은 큰 뜻을 품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 거창한 꿈이라서인지 아니면 막연한 꿈이라서인지 누군가에게 이런 꿈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교사라는 꿈을 명확하게 밝힌 미영이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문학을 만났어요>



책이라는 것을 읽어보기는 중학교 일 학년 때가 처음이었다. <엄마 왜 나만 검어요>라는 책이었다. 흑인 혼혈 아이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차별을 다루고 있었다. 슬프고 억울한 주인공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하며 펑펑 울었다. 이후 한두 권을 더 읽기는 했지만, 중학교 때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해 주던지 영화 대신 책을 읽었다. 그때 몇 권의 세계문학전집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고등학교 때 만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소녀의 인생 책이 되었다. '태어나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알을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라는 구절을 보며 자신도 알에서 깨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는 하이틴 로맨스니 아메리칸 로맨스니 하는 요즘 웹소설 같은 로맨스가 유행했다. 중학교 때 과학을 좋아했던 남자애를 마음속으로만 연민했을 뿐 연애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로맨스 소설이 말랑말랑하게 소녀감성을 자극하여 많이 읽었다.


소녀가 중학교에 들어가니 교실 벽면에 '서시'가 걸려 있었다. 국어시간에 만난 시가 여럿 있었지만 '서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 윤동주 시인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자신도 시인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게 살겠다고 다짐했고, 짧고 굵고 멋지게 살다 가자 했다.





소녀가 자랄 때는 박정희와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이었다. 전쟁을 극복한 부모님은 자신은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들 교육만큼은 시켰으며, 언니는 부모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 동생들을 돌보았고, 오빠는 돈을 벌어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도시화로 빠르게 이동했고, 산업사회로의 진입과 핵가족화가 촉진되고 있었다. 품종개량으로 농산물 수확이 늘었고, 새마을 사업으로 농로가 반듯해지고, 시골에 수로가 개선되었다. 지붕개량 사업으로 초가지붕은 스레트지붕으로 변모했다. 이제 겨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지만 늘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시절이다 보니 개인보다는 가족이나 사회의 안녕이 중요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교육에 대한 열의가 충만했으며, 남과 북의 대치상태로 반공교육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전체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 등 의식함양이 교육과 생활 전반에 이르렀다. 새마을 운동, 국산품애용, 저축 장려운동, 국민체조,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은 잘살아 보자는 운동이었지만 국가관을 심어주는 생활운동이기도 했다.


국기하강식 때는 가던 길을 멈추고 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대목에서는 없던 애국심도 끌어올렸다. (지금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하여*로 바뀌었다.)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이나 담임선생님의 훈화 말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해주시는 좋은 말씀에 귀 기울이며 꿈을 키웠다. 교육 효과가 좋았던지 소녀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 우리나라를 빛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초등학교 때 가훈 쓰기가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정직, 근면, 성실, 실천'이라고 써 주셨다. 소녀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시대와 함께 살았고, 시대는 소녀를 키웠다. 소녀는 누군가의 돌봄과 희생으로 자랐으며, 사랑의 힘으로 단단해져 갔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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