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자서전 쓰기 프로젝트
소녀는 꿈에 그리던 도시로 진학에 성공했다. 어머니는 뺑뺑이로 당첨된 학교이긴 하지만 도에서 명문고등학교로 알려져 있는 여고에 입학하게 되어 무척 좋아하셨다. 소녀도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기뻤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곧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다. 또르르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난다는 꿈 많은 여고시절이라는 말은 옛말이었다. 변화무쌍한 친구관계와 대학 입시라는 공부 부담은 명랑함을 꽃피우기에는 힘겨움이 많았다.
<보고싶다 친구야~~>
꿈에 그리던 도시로 고등학교를 입학했지만, 시골 촌뜨기가 도시로 와보니 처음에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은 친구들과 한마디도 못했다. 낯가림이 심해서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거의 한 달은 말도 못 하고 지내는 편이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는 더 심했다. 나중에 친구들이 말하기를 네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 몰랐다고 말할 정도였다. 말문이 트이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니 예전에 명랑 소녀의 기질이 드러났다. 친구들에게 만주 봉천에서 왔다고 뻥을 쳤더니 믿어주기까지 했다.
반에는 유쾌 상쾌 통쾌한 친구들이 많았다. 제법 똑똑하고 위트 넘치며 끼가 많은 친구들이었다. 반의 중심인물은 반장, 부반장, 선도부장 등 학급 주요 인사들이었는데 조금은 소란스러울 정도였다. 선희는 반장이었는데 활력이 넘치고 위트 있는 말도 잘했다. 경희는 키가 컸고 성격도 좋고 지도력도 좋았으며 선생님들로부터 칭찬도 많이 받았다. 윤리선생님이 꿈이었던 친구는 윤리과에 진학했다. 숙영이는 까무잡잡하고 재미있었으나 불만도 잘 표현하는 편이었다. 정란이는 미술을 했는데 말도 잘했다. 정란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를 보고 어찌나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던지 덕분에 책을 읽게 되었다. 정란이 덕에 세계 문학전집을 읽게 되었고, 하이틴로맨스와 아메리칸 로맨스 소설도 알게 되었다. 의사가 꿈인 친구도 있었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유난히 예쁨을 받아서 질투를 유발한 친구도 있었고, 성악을 잘하는 친구도 있었다. 각양각색은 친구들은 짓궂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보지 못한 새로운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반장을 중심으로 담임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많아졌다. 아니, 반장과 부반장의 불만이 많아진 것 같다.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을 차별한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십여 명이 몰려 앉거나 분위기를 좌지우지했으며 센 기질의 친구들이 한몫했다. 성격도 다양하고 재주도 많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것을 다 담기에는 담임선생님의 능력도 부족했다. 친구들은 담임선생님 별명을 붙이고 당시 유행하던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온 반이 떠들썩하게 했다.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옆반 선생님이 오셔서 일학년 중 가운데 반이 제일 시끄럽고 요란하다면 큰일이다는 투로 나무라곤 했다. 소녀도 친구들의 태도나 행동이 정당한지 어쩐 지를 따져보지도 않고 덩달아 동참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다. 고1 때 어울렸던 친구들은 대부분은 문과를 가고 소녀는 이과를 가면서 이후에는 자주 만나지 못해서 아쉬웠다.
고1 때 같은 반이었던 승은이는 소녀와 같은 이과로 가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자주 만났다. 승은이는 시골출신이라 통하는 부분도 많았다. 서로의 자취집을 오갔고, 시골집에도 초대를 했다. 승은이는 중학교 때 탁구 선수를 했고 야무지고 단단한 친구였으며, 조용하면서도 농담도 잘했고 성숙한 친구였다. 제법 말이 통하는 친구였다. 고3 때 승은이가 며칠 학교를 나오지 않더니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듯이 공부에서 손을 뗐다. 친구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고3이라는 바쁜 시기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승은이와 멀어졌고 졸업 후 한번 만났을 뿐이다.
고2 때는 학교 6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반에서 스페인 캉캉춤과 투우 놀이를 했다. 소녀는 소역할을 하는 둘 중 한 사람을 자처했다. 소녀는 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법한 일을 선택한다. 중학교 때는 큰북을 쳤고, 초등학교 때는 소꿉놀이에서 동생보다는 언니를, 아이보다는 엄마를 선택했다. 소녀의 허세인지 뭔지 모르겠다.
고2 때 같은 반 진영이와 선미 덕분에 노래에 대한 많은 추억을 쌓게 되었다. 선미는 노래를 잘했다. 소풍 때마다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곤 했다. 선미가 자기 교회에 진영이와 소녀를 초대했다. 크리스마스 행사가 많은 교회에서 선미가 성가대 연습을 하고 교회 오빠와 노래 연습하는 것을 구경했다. 교회 오빠를 좋아했던 선미는 나중에 부부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선미가 좋아하고 잘 불렀던 송창식의 '푸르른 날', 양희은의 '찔레꽃'은 소녀도 애정하는 노래가 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이종환의 디스크쇼'에 송창식이나 양희은이 나오는 날이면 귀를 쫑긋 세우고 밤늦게까지 들었고, 다음날 만나서 서로 이야기 나누며 즐거워했다. 대학교 때 '찔레꽃'이라는 동아리에 들아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친구들과의 추억 덕분이다. 고3이 되어 선미는 다른 친구와 단짝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마치 유명한 연인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소녀는 진영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져가는 선미를 안타까움과 서운한 마음으로 바라 보았으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차마 질투가 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고3 때 친구 문숙이는 소녀를 꽤 아껴주고 좋아해 줬다.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했으며 키가 컸고 성격도 좋았다. 부모님이 정성으로 도시락 두 개씩을 싸줬는데, 저녁에는 따뜻한 밥을 직접 배달해줬다. 소녀가 손수 싸는 도시락과는 달랐다. 문숙이는 소녀가 자신과는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고 서운해했다. 소녀는 고맙기는 했지만 더 마음을 쓰진 않았다. 더 마음을 쓸 새도 없이 공부라는 무게에 친구관계는 무감해졌다.
고3 때는 같은 반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고, 이전 친구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대학입시라는 과제 덕에 모두가 각자의 삶 속에 빠져있었다. 고3때는 친구말고 공부에 대한 부담이 많았다. 공부해야 할 과목도 많고 공부량도 많았으며 어려웠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진도는 안 나가고 더디기만 했으며 성적도 오르지 않았다. 또 좋아하던 작은언니가 시집을 갔다.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식목일에 시집가는 언니를 보며 형부에게 뺏긴 것 같아서 슬펐다. 또 다른 일로는 교장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는데 무척 사나웠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그것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 자율학습도 그야말로 자율학습이 아닌 타율학습으로 모든 학생들을 저녁 늦게까지 남아서 공부하도록 했다. 교장선생님의 그런 행동이 싫어서 자율 학습 시간에 아프다고 하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를 깊이 사귈 수 있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공부와 대학입시라는 삶의 무게에 갇혀 친구를 신경쓸 수 없었다. 각자 삶의 고독과 고난을 스스로 이겨내거나 짊어지고 살아갔다.
자서전을 쓰면서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뒤적였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을 찾아보고, 얼굴은 생각나는데 이름이 가물 가물한 친구를 맞춰보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아는 얼굴을 보며 이름도 불러본다.
"어머, 얼굴 생각난다. 그때도 예뻤는데 사진도 예쁘게 나왔네. 이 친구는 멋있고 예쁜데 사진이 잘못 나왔네. 이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동창회가 있다면 가보고 싶네. 1학년 5반 반창회라도 하면 가서 보고 싶네."
<열여섯 소녀의 자취생활은 고달퍼 >
고등학교 때는 자취를 했는데 어떤 해에는 셋째 오빠하고 또 다른 해에는 넷째 오빠와 함께 했다. 대학 등록금으로 경제적 부담이 있기 때문에 오빠들은 대학이 겹치지 않도록 군대를 갔다.
어머니가 얻어주는 자취방은 어느 집의 문간방 아니면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먼 곳, 아니면 가장 싸고 허름한 방이었다. 어머니가 큰오빠에게 사준 집도 있었으나 안방에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곁방에 살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문 왼쪽에 시멘트로 가건물을 하나 지어 세 명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에서 주로 자취를 했다.
자취할 때 제일 난감한 것은 시골에 다녀온 날이나 야간자율학습 하고 오면 연탄이 꺼졌을 때다. 추운데 손을 호호 불며 번개탄을 피워 가스냄새를 맡으며 연탄을 살려야 했다. 정히 되지 않으며 안집에서 불을 빌려야 했다. 언니 오빠들은 자취방에서 연탄을 마셔 의식을 잃었던 때도 있었으나 소녀는 그런 일은 없었다. 겨울에는 연탄불에 밥을 하고, 물을 데워서 사용했다. 여름에는 석유곤로에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소녀에게 반찬을 하고 도시락을 싸는 일도 만만찮았다. 오빠와 같이 자취를 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아니 그런 의식도 없이 당연히 열여섯 소녀의 손으로 도시락을 쌌다. 중학교 때 어머니가 안 계실 때 잠깐씩 밥을 하는 것과 자취하면서 상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제 공부에도 바쁜데 반찬을 만들고 도시락을 싸는 일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도시락 싸는 것은 부담스러운데 그때는 오죽했으랴. 어머니가 해주신 김치나 밑반찬은 곱지 않아서 친구들 보기 부끄러워 도시락으로 그대로 쌀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늘 새로운 반찬에 골머리를 앓았다. 가장 많이 한 반찬으로는 어묵볶음, 호박볶음, 고추조림, 두부조림, 계란말이 같은 거였다.
어머니가 주신 용돈은 늘 부족했다. 용돈이 다 떨어지면 반찬거리를 살 수도 없고 도시락을 뭘 싸야 할지 고민이었다. 다행히 돈이 떨어질 때쯤 어머니가 오셨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돈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야채를 팔기도 하고 고무 다라이를 땜질하여 용돈을 댔다. 어머니가 허리춤에서 쌈짓돈을 쏟아놓기 시작하면 방안 가득 쌓일 정도였다. 어머니는 돈이 떨어질 때를 어찌 그리 잘 알고 오시는지 신기했다. 돈이 없어서 마음 조릴 때면 어김없이 자취방에 오셨다. 어머니는 소녀가 대학 입시 보던 전날도 찾아왔고, 기말고사나 중간고사 때도 귀신같이 잘 알아서 오셨다. 부모님은 농사이외에 벌이를 하셨다. 아버지는 소를 키우고 닭, 돼지를 키우기도 하셨으나 신통치 않았다. 어머니는 야채를 팔거나 맨몸으로 나가도 돈을 벌어오셨다. 자식들에게 실질적인 경제 도움은 어머니가 담당하셨다.
<고등학교 공부는 어찌 이리 어렵나>
고등학교 일 학년 때는 공부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량도 많고 어려워졌다.
수학은 아무리 열심히 풀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쌓여 갔고, 영어는 단순 암기만으로는 따라가기 어려웠다. 화학은 외워야 할 것이 많았고, 물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 태반이었다. 중학교 겨울방학 때 놀지만 말고 공부 좀 할 걸 그랬다. 지금도 가끔 시험 보는 꿈을 꾼다. 마음은 급하고 아는 문제가 없어서 조바심을 내는 꿈을 꾸는데 고등학교 때의 어려움이 남아서인 것 같다.
학부모 상담 시간에는 부모님 대신 작은언니가 왔다. 대학 입시 원서를 쓰기 전 입시 상담도 작은언니가 해줬다. 소녀네 집은 부모를 대신해서 언니와 오빠들이 학부모 역할을 했다.
소녀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연합고사 대신 선지원 후시험 제도가 처음 치러졌다. 선지원 후시험 제도는 한해만 치러지고 사라졌다. 이과를 가면서 판사라는 꿈은 접었고, 과학자라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물학과에 가려고 했다. 대학 진로를 놓고 언니 오빠들이 말했다.
"생물학과 가서 뭐 하려고 그래."
"너는 선생님은 싫다고 하니 간호학과 가라."
언니 오빠의 충고가 타당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고, 성적과 취업이라는 현실 앞에서 수긍하기도 했다. 게다가 고2 겨울 무렵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간호학과에 가면 아버지께 도움이 될 것 같았고, 아픈 사람을 돌봐주는 일은 보람도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간호사라는 꿈이 마음으로 들어왔다. 다른 학교보다 먼저 입시를 치르는 간호사관학교 시험을 광주에 가서 봤다. 어머니랑 같이 갔는데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려 그 집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도 했다. 간호사관학교는 불합격했고, 국립대 간호학과에는 운 좋게 합격했다.
열여섯열일곱열여덟 소녀가 그때 그곳에 있다. 어려운 공부와 많은 분량의 학습을 하며 끙끙대던 소녀의 등을 토닥여준다. 번갯불을 피워 연탄을 살리고 이산화탄소와 암모니아 향을 맡으며 기침하던 소녀의 곁에 조용히 머무른다. 그 시절 친구들도 불러본다.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며 놀았지만 친구들도 고뇌에 찬 시기를 지나가는 중이라고 그리고 잘 견뎌낼 거라고 손 맞잡아 준다. 그때의 소녀들을 생각하며 지금 만나는 학생들의 손을 잡아주고 등도 다독여준다. 젊고 씩씩했던 어머니도 만난다. 일자무식 배움이 없는 어머니가 삶을 억척스럽게 꾸려가던 모습이 생생하다. 어떻게든 자식을 가르치겠다고 불철주야 일하시는 어머니의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애잔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임을 알고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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