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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우혜우 Jan 04. 2022

어떤 예술과 일상의 줄다리기

-한강의 <<몽고반점>>-

 


 나는 남매를 기관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아침마다 운전을 한 적이 있다. 왕복 20여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종종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기관용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아이들을 픽업하는 시간이 내게는 차량을 기다리며 주변 엄마들과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아야 하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한 시간이다.

 특히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고 집에 홀로 오는 시간 동안 그 행복감은 더 상승한다. 오는 길에 주로 차 안에서 자우림과 윤상의 노래를 듣는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 내 가슴속의 폭풍은 언제 멈추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 있네.”라고 읊조리는 김윤아의 노래와 음률은 자동차 안이라는 움직이는 좁은 공간에 뒤섞이면서 순간이지만 예술적 자기 세계를 창출해낸다.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예술적 주체가 있다. 그 예술적 주체를 일상적 주체에 비해 어느 정도 노출시키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유치원 차량을 기다리며 나누는 엄마들과의 수다와 인사가 즐거울 것이고 누군가는 그 시간이 공허하게 느껴질 것이다.

 ‘몽고반점’의 처제는 “내면에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예술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그래서 일상을 영위할 에너지가 부족해 보인다. 외부 환경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색이 거의 없는, 적막해 보이는 덤덤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가끔 희미하지만 힘이 있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을 보여준다. 마치 수도승과 같은 그녀의 표정은 그녀의 내면에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히거나 앙금으로 가라앉은 후에 나온 덤덤함인지 짐작할 수 없게끔 한다.

 역시나 내면에 강렬한 예술적 욕망과 주체를 지닌 형부는 처제의 예술적 주체를 알아본다. 마치 결핍이 결핍을 알아보듯. 그리곤 그녀의 예술적 주체를 끌어내 교류하고자 한다. 일상적 주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절대 순수의 원시성과도 같은 처제의 몽고반점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주변 사람들이 비난하는 처제의 채식과 자살 시도를 그는 바라봐 줄 수 있다. 그는 처제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주변인들(장인, 아내, 처제의 남편)처럼 규범이라는 잣대로 비정상이라 단정 짓지는 않는다.

  그는 항상 친절하고 인내심 많은 ‘정상적’인 아내에게 고마워하면서도 지쳐있었다. 그것은 백일 중 99일을 잘 살아도 단 하루 만에 삶을 포기할 수도 있는 현실의 부조리와 유사한 메커니즘이다. 모든 것이 평온해 보여도 단 한순간에,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는 임계점이 있는 법. 그 임계점을 벗어나면 예술적 주체는 일상적 주체와의 밀당을 포기하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온전한 예술적 주체의 폭발은 정상성을 벗어나게 되고 정상성을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병리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처제와 형부라는 일상적 주체의 가면을 벗고, 온전한 예술적 주체로 서로의 몸에 꽃을 그리며 알몸으로 교류했을 때, 비로소 그들은 순수하고 원시적인 예술적 자기 세계 안에 안착하고 몰입한다. 그들은 그 순간 병리적인 억압을 주는 현실과 일상에서 벗어나지만 그 벗어남은 영원할 수 없다. 그의 아내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그들이 한 예술적 행위와 충동, 욕망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혐오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곳은 정신병원이거나 죽음뿐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예술적 주체와 일상적 주체의 줄다리기는 인간으로서, 정상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평생 관리하며 지고 가야 할 할 업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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