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종영한 ‘W’라는 드라마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여자 주인공인 연주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 주인공 강철이 살고 있는 웹툰 <W>의 가상 세계이다. 남자 주인공 강철은 작가가 만들어낸 만화 캐릭터이지만 현실 속 연주와 엮이면서 자신이 살던 세계가 허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작가의 연재 스토리나 의도를 거부하게 된다. 캐릭터들은 각자가 존재의 이유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작가의 창작 의도와 상관없이 자율성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고 본래의 계획된 이야기는 꼬이고 얽히기 시작한다.
이렇듯 작품이 작가를 배반하고 초월해버리는 상황은 「옥수수와 나」에도 언급된다. 소설가 박만수의 비천한 문재와 사상을 훌쩍 뛰어넘어 이야기는 저 홀로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다. 쓰다 보면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되면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 자체가 생명력을 지니고 육체인 박만수의 손을 빌려 쓰인다는 조금은 황당한 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이 황당한 지경, 본래 가려던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비로소 도달하는 것, 어쩌면 우리 삶의 역설일지도 모른다.
그의 친구인 철학 교수는 소설은 관념에서 시작해 거기에 육체를 더하는 작업이라 주장하지만 이에 박만수는 오히려 소설은 쓰는 행위 자체가 매우 육체적인 것이라 반박한다. 소설가는 문학계의 해병대이자 육체노동자, 정육점 주인이라는 것. 그렇기에 소설가 박만수는 출판사 사장의 부인과 섹스를 하면서 그녀의 몸에 해독 불가능한 문장들을 무수히 입력해 넣는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과도 같은 소설 쓰기에 몰입했을 때,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듯한, 삶과 죽음, 성과 속의 경계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뉴욕도 서울도 아닌그 모든 곳의 중간, 세계의 빈틈, 영혼과 육신의 테두리, 문자와 세계의 문턱에 있는 경계인이 되는 것이다.
「옥수수와 나」는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의 자율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옥수수가 아님을 깨닫고 그렇게 주장해도 독자들이 내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야기는, 삶은 엉뚱하게 흘러가게 되어있다. 이는 탈구조주의 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언어적 힘들은 정복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텍스트를 완벽하고 계획적으로 분석하고 창작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며 헛된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시어는 이미 지시 대상을 떠나 떠다니고 작품 속 주체들은 작가의 영향을 벗어나 마음대로 표류하기 시작한다. 출판사 사장이 요구하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작품을, 소설가 박만수는 쓸 수 없을뿐더러 아마 쓸 수 있다 하더라도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는 언술 행위란 완벽한 의미로 충만해지는 행위가 아니라 텅 빈 과정에 불과한, 일종의 무의미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나 저자는 더 이상 글쓰기의 온전한 생산자나 기원이 아니다.
나는, 소설가 박만수는, 이혼남 박만수는, 정작 전처의 애인이 자신의 친구인 철학교수라는 사실도 몰랐던 형광등이다. 난해하고 음란하고 해체적인 인생의 주인공이자 저자라고 우기지만 또 다른 주체들 입장에선 눈치 없고 어리석은 주변부 인물에 불과하다.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누구도 출판해주지 않을 이야기의 저자이자 주인공이자 타자가 되는 것이다. 본인이 아무리 옥수수가 아니라고 피력해도, 자신의 정체성조차 확신할 수 없는 해체적인 삶의 무대에 서 있는 그는 결국, 닭들에게 먹히는 옥수수로서 그의 삶을 규정당하고 마감할 수도 있다. 이것이 곧 현대의 아이러니이자 비극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