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호재’는 부동산 카페와 증권 거래소에서 시세 상승의 요인이 되는 조건으로 반기는 호명이다. 그러나 소설 <호재>의 주인공 호재는 살인자의 전과를 지닌 아버지 아래서 부모의 방임과 부재를 숨기느라 지쳐가는 유년 시절을 보낸다. 밖으로만 나도는 부모 밑에서 살아갈 자신감이 빠르게 바닥나던 차에, 고모는 때마침 등장한 유일한 보호자였고 고모가 누구의 동의도 없이 자기를 데려가는 일이 어째서 가능한지 호재는 알고 있다. 때맞춰 수업 준비물을 마련하는 일조차 버거운 일상을 견디고 있을 때, 호재는 고모가 자신을 맡아주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더 불행하지 않은 것에 만족하며 굴복하는 일에 익숙하다.
호재의 아버지, 두오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친구 두 명과 함께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는 그 죄를 우정이라는 명목 하에 혼자서 감당한다. 두오에게 큰 빚을 졌다며 고마워하는 친구들의 말을 신뢰하고 평생을 약속한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을 대신해 감옥에 가는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감격해한다. 적어도 우정이 지닌 차별성의 원리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두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한 숭고한 인물이다. 우정이란 몇 몇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을 남들과 다르게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면을 살피면 두오가 우정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것은 그가 경제구조나 사회구조를 매개로 관계를 맺는 상호작용에 취약한 이이기 때문이다. 호재의 할아버지이자 두오의 아버지는 몇 년 동안 집에 들르지 않고 목돈만 부쳐주거나 초라한 행색으로 가끔씩 집에 들르는 정확한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아버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적 관계 맺기를 배운 적이 없는 두오는 사회구조를 경험하는 학교에서도 적응하지 못한다. 행실이 나쁜 친구들과 우정을 쌓으면서 두오는 현대의 관계 맺기는 구조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해관계’와 구조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익숙하지 않다. 즉, 두오의 관계 맺기 방식은 구조의 바깥쪽으로만 편중되어 있다. 사회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복할 힘은 더더욱 기르지 못하는 두오의 계층적 취약점은 소설에서 듀오가 운전하는 택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구체화된다.
두오가 근 10년 때 몰고 있는 택시는 낡을 대로 낡아 보기에도 퍽 위험했다. 범퍼의 오른쪽은 우그러졌고 조수석 문은 가로로 깊게 파인 지 오래여서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수리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대신 차 안을 장식하는 데 공을 기울인 티가 확연했다. (<호재>, 145쪽)
평생을 떠돌고 정착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두이, 두오 남매의 아버지에 이어 두오는 전과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생계를 위해 택시 운전기사가 되어 밖으로 나돈다. 꼬리표를 회피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식이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장소를 벗어나는 것. 그것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물론 택시기사로서 손님과 관계 맺기에서도 두오는 사회구조의 일반적인 상호작용을 무시한다. 두오는 승객들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든지 핸드폰을 본다든지 하는 침묵을 원하는 표시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에게 복주머니에 든 사탕은 승객들에게 베푸는 선행의 일종이어서 요즘 사람들과 작금의 세상을 판가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된다. 그는 운전기사와 손님이라는 특정한 지위나 역할로 연기해야 하는 상호작용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요즘 사람들은 자기만 믿는다니까. 다들 인정을 몰라. 운전대 잡은 나를 안 믿으면 누굴 믿어?”라며 구조 바깥의 사고와 언어 양식을 고수한다.
문제는 이러한 두오의 무지로 인한 과오가 두오의 누나를 비롯해 그의 딸 호재, 가족 전체에게 ‘스티그마’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호재는 하루 동안 겪은 불친절한 응대들이 차례차례 떠오를 때마다 그냥 넘길 수 없다. 항상 남들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추측하게 되고 기어이 울적해진다. 그리고선 자문한다. “예전부터 혼자였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혼자일 자신의 삶을 사람들도 은연중에 느끼고 알아 버렸기 때문일까? 재수 없는 날에는 자꾸 옛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연히 불행한 건지, 당연히 불행한 건지.” 호재를 옥죄는 어둠은 이중으로 존재한다. 눈앞을 가린 짙은 어둠과 뒤를 바짝 따라오는 텅 빈 어둠. 호재가 두려워한 어둠은 후자이다. 코앞의 미래를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지나온 궤를 알고 뒤돌아보는 일은 본인만의 것이니까. 그것은 아무리 감추려고 노력해도 타자와의 상호작용에서 불리하게 작용하면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2.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슬픈 사람들을 무서워해요.
호재의 아버지 두오는 감옥에 다녀온 수감자였다. 그는 의례적 질서가 적용되는 공간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경험이 있다. 살인자의 가족들은 감옥과 같은 수용소에 배치되어 공식적·물리적으로 고립되지는 않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보이지 않는 스티그마에 시달린다. 그들은 엄밀히 말해서 일상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공적인 공간과 수용소와 같이 고립되는 공간의 사이, 혹은 경계에 있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2015, p.126)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불안정하게 통합된 사람들이다. 스티그마를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외적 결함, 혹은 상처로 인해 자신의 짐이 무겁다거나 그 짐을 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암묵적으로 요구받고 그것은 유년기부터 무의식 중에 형성된다. 타고난 대로 사는 것을 겁내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들은 슬프지 않은 척 위장한다.
유년기는 추억으로 남는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 그 생을 마감한다. 회상할 좋은 추억이 없는 이들은 처음부터 ‘자기 세계’에서 모든 것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좋은 기억을 선사받지 못한 소설 속 주체들은 평생 지속되는 허기를 가지고 산다. 타인과 있어도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고 때문에 들뜬 마음을 감추고 무력함이 우선한다. 사람들과 똑같은 대열에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언제나 외로운 형태로 비밀을 간직한 그들은 그 비밀을 타인과 공유하지 못하고 공유하지 않는다.
나와 다르다고 할 만한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엔 하나도 없어서 이상했을 뿐이었다. 평균 이하의 성적으로 내신 1등급 우등생들의 든든한 바닥들이라고 싸잡아 폄하당하는 동병상련의 처지들이 누구인지 겉만 봐서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호재>, 119쪽)
호재의 고모 배두이 역시 사는 일의 고초는 유년기에 이미 겪을 만큼 겪었다고 자부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하다. 세상만사가 순조로운 적이 없었는데 닥치는 일마다 당연하게 여겨져서 울지 않았고 살면서 으레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관통할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며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 상태는 최악과 최선의 길항작용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기에 ‘평안함’이나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 슬픔이란 감정은 기쁨이라는 길항작용이 없다면 정화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최고의 선’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일상이 된 최악의 경험들을 무심하게, 질 나쁜 일상을 그냥 삶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럼에도 고모 배두이는 자신의 경험이 대물림될까 봐 호재를 걱정한다. 자신의 남편이자 호재의 고모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때 고모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들려주면 제 아버지처럼 불운한 내력에 짓눌리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불행의 주인공이 되길 자처하진 않을까, 아니면 기껏 나처럼 웃지도 울지도 않는 불능한 사람이 되진 않을까.
이 지점에서 호재는 고모 배두이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호재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보유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보유하지 못할 때 공황 상태가 엄습하며, 당사자는 처리되지 않고 명명되지 못한 감정들로 가득하게 된다. 불안을 보유해 줄 애착 대상이 없다는 것은 불안이 “이름 붙여지고” 결속되는 대신, 이름 없는 두려움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층 강화되어 그 사람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리키 이메뉴얼, 김복태 역, <<불안>>, 2003, p.82) 이때 그 사람은 두 배 분량의 불안을 처리해야만 한다. 그것은 강화된 형태로 자신에게 다시 투사된 원래의 불안에 덧붙여 자신을 위한 보유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안, 그래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불안도 함께 갖기 때문이다. 이것이 호재를 옥죄는, 눈앞을 가린 어둠보다 더 두렵다던 뒤를 바짝 따라오는 텅 빈 어둠의 실체이다.
3. 만사가 쉽지 않은 상태에서 딱히 만사가 쉬워지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만 가능한.
배두이, 배두오, 배호재, 고모부, 이들은 경제적·사회적 구조의 이해관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소유한 재산이 거의 없기에 가족의 구성원보다 재산관리에 중점을 두는 가부장제의 가족형태와도 거리가 있는 관계들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유대가 물질적인 것에 바탕을 두는 만큼 이들은 대한민국 평균의 가족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사람에 토대를 둔 가족의 형태에서는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다. 부족한 형편이라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고 단출하게 살아온 고모 부부는 사랑으로 호재를 키우고 살인자라는 전과를 지닌 동생 때문에 보이지 않는 스티그마를 감수하면서도 두오를 이해하려 애쓴다. 어떤 기도도 무용하고 어떤 욕도 무감하게 느껴져 저절로 입을 꾹 다물게 되더라도 결코 사람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한다. 그들이 경제적 토대를 소유하지 못해 경제적인 관심을 관계 바깥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역설이기도 하다.
고모부와 두오는 일관되게 술을 마셨다. 또한 고모부는 한 주도 빠짐없이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그가 번 돈으로 성실하게 로또를 사고 두오는 호재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유용성을 입증하려 평생을 자기 것을 빼앗은 친구들을 뒤쫓는 삶을 산다. 이에 대해서 이들은 누가 만류하든 호응하지 않고 누구의 충고에도 순응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처럼 평범하지만 유효한 삶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해관계로서의 정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는 사회구조 안으로 진입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이 내재되었을 것이지만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고모 두이가 불행을 근거 삼아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두오가 당하는 해코지를 예감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무섭고 두려워한다면 호재는 그것과는 다른 변별점을 생성한다. 삶의 내력을 근거 삼아 다가올 죽음을 추론할 만큼 인과를 믿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인과가 관통하지 않는 일에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수학의 사칙연산을 과감히 포기한다. 어느 선생도 호재의 위풍당당한 포기를 제지하지 않는다. 정말로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됩니까? 호재의 등은 그렇게 물었지만 누구도 호재를 깨워 답해 주지 않고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질문을 던진 사람의 목소리만 공허하게 되돌아오는 현실을 무력하게 받아들인다.
호재는 삶에 대한 거시적인 기대나 전망을 포기하고 단기성의 삶을 수긍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하루 동안 해코지를 당할 만한 짓을 한 적 없고, 빼앗길만한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음을 상기하며 호재는 노상 두려움이 따라오는 자신의 삶을 그럭저럭 부정하면서 수긍한다. 그리고 방송 작가라는 계약직 직업에 딱 그만큼으로만 성실하게 임한다. 지나치게 노력하지 않고 지나치게 방만하지 않는 적정 수준의 노동으로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오늘의 임무를 적절한 수준에서 해내는 날들을 지속시키며 만족해한다.
두오는 친구들이 자신에게 진 빚을 자식인 호재 앞에서 당당하게 받고 싶은 간절한 희망이 무산되는 민망한 상황에서 뒤돌아선 호재에게 “가지 마. 이대로 가면 내 인생만큼 너도 죽 쑤는 거야. 네가 네 인생 책임질 수 있어?”라고 소리친다. 아마도 호재는 마음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남보다 더한 불행을 고백하지 않았을 때, 직장 상사에게 발전과 노력을 맹세하지 않았을 때, 제대로 살고 있다고 스스로 느낀다고. 제대로 살고 있음, 그건 누군가의 평가로 얻어지는 만족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본인만 느낄 수 있는 기분에 가까워서 남들의 품평과는 무관하다고.”
사망한 줄 알았던 아버지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그리고 그 복권을 자신에게 주겠다는 평생의 ‘호재’를 맞은 날. 하나의 의문이 호재를 괴롭힌다. ‘누가 고모부를 죽였을까.’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읊조린다. “얘기하지 마. 나한테 하지 마. 나는 당신의 알리바이가 아니야.” 호재, 그녀는 톡톡히 이름값을 받은 것인지 또 하나의 뒤를 바짝 따라오는 텅 빈 어둠을 받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