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지는 열어봐야 알아요.
남편은 퇴근하고 돌아오면 종종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떡, 디퓨저, 매실효소, 우산, 호두강정 등 지금은 종류가 다 기억나지도 않지만 상당히 많이 받았었다. 처음으로 선물 상자를 건네받은 날, 무엇인지 알 수 없게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보며 "이게 뭐야?" 질문했더니 "한번 열어봐." 하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디퓨저인가 봐! 너무 귀엽다. 안에 뭐가 들어있는 거지?" 바닷속처럼 꾸며진 작은 디퓨저를 한참 바라보며 요란스럽게 들떠있는 내 모습을 본 남편은 흐뭇해했다. 그리고 이내 말했다.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았어."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흘러 남편은 또 선물 상자를 갖고 왔다. 이번에는 두 개였다. "이게 뭐야?" 물으면 항상 말해주지 않고 "열어봐." 하고 말했다. 갖고 온 물건은 디퓨저였다. 한 번에 두 개가 생겨서 거실에 하나, 침실에 하나 뒀다. 그날 자려고 나란히 누웠는데 향기가 느껴졌다. "향기가 참 좋다.. 그렇지?" 남편에게 물었다. 나의 질문에 공감하며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며 남편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두 개를 갖고 왔다고 말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처음 디퓨저를 받았을 때 침실에 뒀다가 거실에 뒀다가 위치를 바꿔가며 두는 내 모습을 눈여겨봤을 거라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남편이 가져온 선물 상자에는 떡이 들어있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떡이었다. 색색별로 예쁘기까지 했다. 한입에 쏙 넣어서 먹어보니 꿀이 흘러나왔다. 달콤하고 쫀득했다. "당신도 한 입 먹어봐." 하고 말했지만 남편은 먹지 않았다. 또 몇 개월이 흘러 받은 선물 상자에는 떡이 들어있었지만 역시 남편은 나에게 모두 양보하며 먹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먹거리를 가져올 땐 항상 떡이었지만 남편은 양보만 했다. 그런 남편을 보니 나만 챙겨주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또 떡을 받게 됐을 땐 이번에는 결단코 나눠 먹겠다고 생각했다. "진짜 맛있는데, 당신도 먹어봐." 끈질기게 권유했다. 그런 내게 남편은 망설이다가 실토했다. 사실은 떡을 좋아하지 않고, 떡은 식감이 좋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를 위해 양보하는 줄 알았는데 무거운 마음이 가시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안 먹었던 거였다니! 내 감동 돌려줘!!'
언젠가는 손잡이가 달린 새하얀 선물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를 열어 꺼내보니 지퍼백 포장이 된 봉투가 나왔다. 이번에는 달달한 호두강정이었다. 한 입 먹어보고 감탄하며 "당신도 먹어봐." 권유했는데 떡과는 달리 덥석 한입 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나만 더 줘." 떡이랑은 이렇게 반응이 다르다니! 남편은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미식가였다.
기다란 상자를 가져온 날은 우산인 것을 직감했다. 예상은 들어맞았지만, 펼쳐보니 얼마나 크고 튼튼하던지! 이번에도 요란스럽게 기뻐하며 둘이 쓰기에 딱 좋다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흐뭇해했다. 어느 날 가져온 매실효소는 예쁜 유리병에 담겨있었다. 그때까진 할 줄 아는 요리만 잘해서 ‘이걸 어떻게 써먹지?’ 머리를 써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이렇게 남편은 항상 예고도 없이 퇴근길에 선물 상자를 들고 와서 나의 궁금증을 유발했다. 받은 선물들은 몇 가지를 제외하곤 대부분 아담했고 내 취향에 걸맞게 아기자기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포장이 예뻐서 풀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선물들의 정체는 모두 결혼 답례품이다. 직장 동료들이 답례품을 돌리면 포장을 열지도 않고 가져오는 것이었다. 궁금하면 열어볼 만도 한데 매번 포장된 그대로 가져왔다. 주변 사람이 포장을 뜯어서 무엇인지 알게 되더라도 내게는 항상 무엇인지 비밀이었다. 그런 남편이 참 귀여웠다. 지금도 여전히 회사에서 받은 무언가가 생기면 퇴근하자마자 나에게 건넨다. 우리가 결혼할 땐 흔하게 떡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트렌드가 바뀌어가는지 종류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남편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리고 내게도 잘된 일이다. 나는 떡을 좋아하긴 하지만 나눠먹을 수 있는 간식이 훨씬 더 좋다. 내게 양보하느라 직접 먹진 않고 아기새처럼 주는 대로 받아먹는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더 먹고 싶었는지 인터넷으로 찾아 주문 좀 하자고 했었는데, 역시 먹는 것에는 진심이다. 그런 당신에게 양보를 받다니, 사랑은 위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