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7년 차 자연임신
첫 번째 임신은 아니다.
2022년 12월에 그토록 기다리던 첫 임신을 했었다. 결혼 4년, 임신준비 2년 만에 찾아온 간절했던 첫 임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것 투성이인데, 어쨌든 당시의 일을 조금 기록해 둔다.
유방 통증이 너무 심해지고 곧잘 먹던 조미김에서 어물전 바닥 맛이 난다고 생각해서 임테기를 썼다. 묵묵한 한 줄 임테기를 수십 통이나 버린 다음이라 기대가 적었는데, 선명한 두 줄이 금세 나타났다. 일주일을 간신히 참아 산부인과에 방문했다. 5주 차라는 기쁜 소견과 아기집 초음파를 보고 신난 것도 잠시, 당화혈색소 9.0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마주했다.
다음날 곧장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먹던 당뇨약을 끊고 인슐린 주사로 바꿔야 해서 그랬다. 인생 첫 인슐린 주사여서 지나치게 높던 혈당을 잡는 것도 문제였지만 저혈당 문제를 겪지 않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장장 아흐레를 입원했다. 퇴원 때까지 혈당을 끝내 안정적으로 잡지는 못했지만 차차 지켜보기로 했다.
퇴원하던 날 산부인과 검진을 갔다. 이상하게 유방통도 좀 없는 것 같고 입덧이랄 것도 없었다. 산부인과 초음파 검진 결과는 좋지 않았다. 지난 검진 이후 9일이나 지났는데 아기의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심장소리도 당연히 없었다. 나흘 뒤 한 번 더 검진해 보자고 했고, 그때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유산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끔찍한 나흘이 지나고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았다. 북적북적한 종합병원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우리 부부만 덩그런 섬처럼 느껴졌다. 진료를 기다리는 내내 나는 "누가 나를 흠씬 때려줬으면."하고 바랐다. 한참 뒤에야 그게 자책이란 걸 알았다. 견디기가 어려웠다. 다 나 때문이었다.
결국 내 아기집에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텅 빈 아기집만 조금 자라 기다란 모양으로 새카만 심연을 품고 있었다. 며칠 뒤 소파술을 했다. 중간에 마취가 깨어 버둥거리며 괴로워했다. 그러고도 한 달가량 출혈이 계속되어 다른 산부인과에 방문했다. 검진을 하고, 다시 한번 소파술을 진행했다. 몸이 아픈 건 전혀 없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조금 울고, 두 번 정도 내 뺨을 후려쳤다. 시원했다.
오래도록 아이를 기다렸다.
26세부터 2형 당뇨약을 먹고 있는 소아비만 출신인 데다, 다낭성난소증후군도 있어서 배란이 불규칙했다. 일평생 규칙적이지 않은 생리를 했다. 한동안은 열의에 차서 임신에 적합한 몸을 유지하겠다며 인슐린 주사를 계속 맞았다. 1년은 꼬박 그랬다. 인슐린을 맞으면 살이 찐다. 인슐린 민감도를 높여 당 흡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는커녕 5kg이 더 찐 몸이 되어 맞는 옷이 없었다. 그래도 동네 산부인과에 다니며 배란 유도제도 먹어 보고, 숙제날을 받아오길 몇 달. 아이는 오지 않았다.
인슐린 주사를 맞으니 자꾸 조바심이 났다.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왜 안 생겨?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해? 게다가 내 경우엔 경구약이 혈당조절에 훨씬 효과가 있었다. 인슐린으로는 당화혈색소 7~8%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아이는 감감무소식이고. 주변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눈치도 점점 늘고 시어머니의 압박은 조금 더 노골적이어졌다. 나는 자꾸 주눅이 들었다. 갖고 싶지 않은 게 아닌데 다그치는 듯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욕먹어 싼 이유야 많았다. 여전히 비만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난임병원에도 가지 않아서.
그맘때엔 난임병원도 고려했다. 난임 문제를 겪었던 주변인들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가 흘러들었다. 용하다는 어디 병원에서 준 약을 하나 먹었더니 곧장 임신했다, 나팔관조영술부터 해봐라, 역시 난임엔 서울역 차병원이더라... 막연히 남편과 "시험관까지는 하지 말자." 했는데, 난임병원에 발 들이는 순간이 인공수정이고, 한 끗 차이가 시험관시술이란 걸 알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당시엔 꽤 쇼킹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인공임신의 문턱이었다.
"그래도 내 딸 아픈 건 싫다."던 엄마의 말이 무척 힘이 되었다. 아이 욕심이 컸기에 뭐라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때였는데, 엄마는 그래도 내 딸이 우선이라며 다독여주었다. 조영술도 아프다니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던 엄마 말에 눈물 한 번 쓱 훔치고 털어냈다.
물론...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에 든다는 노력과 비용에 대한 부담 탓도 컸다. 단 한 번 시술로 임신에 성공하는 케이스는 거의 없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8백만 원 정도는 들일 각오를 해야 했다. 국가 지원을 받아도 한계가 있었다.
조바심을 내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마음이 쫓기면 될 일도 안 되는 법. 일단 인슐린 주사를 그만두었다. 경구약으로 바꿔 혈당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의 안정은 당연히 필수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기대를 버린다고 버려도 완전히 비워지진 않는 게 사람 마음이다. 매달 은근히 가늠되지 않는 배란일을 예상해 보고, 그날을 그냥 지나치면 내심 아쉽던 날의 연속. 이번엔 특히 그런 달이었다. 하필 배란기로 예상되던 시기에 남편이 매일같이 야근을 했다. 밤 12시에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남편을 잘 다독여 재우기만 해도 다행이던 일상. 이번 달은 역시 공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생리를 할 쯤이 되어도 기미가 없어서 집에 상비약처럼 가지고 있던 얼리 임테기를 사용했다. 아무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괜한 기대였다고 확신하고 그대로 마음을 접었더랬다. 그리고 2주쯤 지났나. 여전히 생리할 기미는 없고 뭔가 묘한 기대가 들어서 마지막 남은 얼리 임테기를 사용했는데... 어어어어엄청 흐린 두 줄이었다. 내가 잘못 봤나 싶어서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다시 확인해야 했을 정도로 흐렸다.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자연 보정되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수준의 흐린 선이었다.
얼리임테기를 새로 사와 날짜별로 테스트를 시작했다. 임신이었다.
이제는 일반 임테기로 매일 테스트를 하기로 하고, 생활습관부터 바짝 고쳤다. 지난번처럼 고혈당으로 아이를 잃지는 않겠다는 일념으로 식사를 타이트하게 관리했다. 지난 유산이 고혈당 때문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게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동안 아무리 마음먹어도 되지 않던 식단조절을 철저히 해냈다. 최근 경구약으로도 혈당관리가 잘 안 되어 주치의 선생님께 혼이 좀 나던 중이었기 때문에 더욱...
철저한 저당 식사를 고집했다. 밥도 정희원 선생님의 저속노화밥으로 싹 바꾸고 양도 많이 줄였다. 안 하던 아침식사도 요거트와 지방&단백질 위주로 하기 시작했다. 매끼 저속노화밥을 100g 미만으로 담은 포케를 먹다시피 했다. 탄수를 거의 줄인 저탄고지 식사...에 가까웠다.
한 달에 한 번도 안 재던 혈당을 하루에 7~8번씩 쟀다. 조금 출출한 것 같으면 일단 혈당부터 쟀다. 혈당이 100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암만 출출해도 간식을 먹지 않았다. 저혈당 증상을 방어하기 위해 치즈를 자주 먹었다. 식사에 고지방 단백질이 들어가면 혈당이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수년간 공복혈당 140 이상을 유지했는데 단 일주일 만에 공복혈당 103을 봤다. 대성공이었다. 한편으론 마음먹으니 이렇게 조절이 되는 걸, 그동안 안 해왔다는 사실이 또 한 번 나를 옭아맸다. 한심하고 또 한심했다. 그래도 슬픔에 잠기기보단 앞으로가 중요하단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인슐린으로 바꾸기 위해 종합병원 내과 진료를 앞당겼다. 피검사를 하고 선생님 앞에 앉으니 최근 7.8까지 치솟았던 당화혈색소가 6.8로 안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임신확인한 이후로 열심히 관리했어요!" 했더니, 선생님 깜짝 놀라시며... "저속노화 그거 드시지 마세요. 케톤이 너무 높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