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낭 호들러와 제임스 앙소르

삶과 죽음, 그리고 가면

by 노인영

호들러의 삶과 죽음의 표현


페르디낭 호들러(Ferdinand Hodler, 1853~1918)는 스위스 베른에서 가난한 목수의 여섯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와 두 동생을, 14세 때에는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세에 제네바로 가서 그림 공부하면서 특히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1521)>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를 따라다닌 가난과 죽음이 만들어 낸 감동이었을지 모른다. 사실주의로는 자기 생각을 온전히 풀어낼 수 없다고 판단, 상징주의로 전환했다. 19세기 스위스 화단을 대표하는 그의 힘 있는 윤곽선과 선명한 색채는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삶(생)에 지치다(1892)>

그의 대표작 <삶에 지치다>를 보면, 곧바로 죽음이 연상된다. 우선 앞에 앉은 인물, 다섯 명 중 가운데 인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는 어깨와 힘없이 축 처진 팔과 다리. 모두 ‘지친’ 모습이지만, 옷을 반쯤 걸친 그가 제일 강렬하다. 옆에 앉은 네 명은 그와는 달리, 수염뿐 아니라 복장, 깍지 낀 손을 통해 좌우 대칭임을 숨기지 않는다. 사제들로 보인다. 기도해주고 있는 모습일까? 단풍 든 앙상한 나무 사이에 세워 둔 흰 스크린 배경, 뚝딱 금세 만든 듯 단조로운 나무 의자, 마치 영정사진을 찍기 위한 세트 같다.

죽음, 아킬레우스는 속삭인다. 신이 인간에게 질투하는 유일한 것이 죽음이라고. 인간은 죽음을 알기에 삶에 진중해진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일 수도 있겠다. 나이가 들면 몸도, 기력도 다 소멸한다. 그럼, 찾아오는 휴식이 있다. 죽음이다.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기 전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거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두렵다. 모르는 길이기에 그렇고, 남아 있는 이들과 영영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머뭇거려진다. 차라리 지금부터 보고 싶은 이들을 띄엄띄엄 만나면서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몽테뉴는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고 겁나는 사건(죽음)에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한다면 철학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남동생 아르노는 겨우 스물세 살에 테니스 공에 맞는 기이한 사고로 숨을 거두었고, 친한 친구였던 에티엔 드 라보에티이 전염병으로 서른두 살에 사망했다. “나 자신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는 깨달았다.


“죽음은 우리가 타고난 조건이다. 죽음이 우리 삶 속에 평생 녹아들어 있다.” (에릭 와이너, <스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우리는 아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이렇게 호들러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이 침잠하게 한다.


앙소르의 ‘가면’


벨기에 화가 앙소르(James Sydeny Ensor, 1860~1949)는 생전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하지만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그는 그곳 화폐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 등 플랑드르 화가의 계보를 잇는 그는 노르웨이인 뭉크처럼 베를린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독일 미술계의 환경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불비했다. 특히 독일 제국의 황제이자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인 빌헬름 2세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궁정화가 아우톤 폰 베르너(1843~1915)의 살롱 스타일을 벗어난 다른 어떤 그림도 ‘저속한 미술’로 분류하였다. 케테 콜비츠나 인상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막스 리베르만(Max Liebermann, 1847~1935)의 작품은 물론 외국의 모든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그림이 모두 이에 포함되었다. (노르베르트 볼트, <표현주의>) 그러나 베를린의 대담한 화상들과 언론, 수집가들은 파리의 혁신적 미술을 베를린 대중에게 소개했다. 뭉크나 앙소르가 베를린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1899)>

1833년 오딜롱 르동을 비롯한 상징주의 화가 ‘20인회’ 전시를 본 이후 앙소르가 변했다. 가면, 해골, 유령을 모티브로 인간의 우매함을 괴기스럽게 표현하여 ‘가면의 화가’로 불렸다. 어린 시절 앙소르는 부모님의 골동품 가게와 카니발의 가면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가면을 위선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았다. 어리석고 악한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들였다.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에서 가면에 둘러싸인 자기 모습을 중앙에 그려 넣었다. 무거운 주제지만, 고갱을 닮아 밝은 색채를 사용했다. 그리곤 가면 뒤에 숨은 인간 개인이 가진 여러 사회적인 모습, 즉 페르소나’를 표현했다.


“얼굴에 가면을 쓰는 것은 마음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헨리 필딩)


그의 가장 난해한 작품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은 매우 자전적이다. 그는 무신론자다. 따라서 이 작품의 모티브는 구세주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빌려왔지만, 자신이 브뤼셀에서 처한 입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작품 규모(252.5 cm×430.5cm)가 너무 컸다. 4층 다락방 마룻바닥에 다 펼쳐 놓고 그릴 수가 없었기에 전체적으로 형태가 통일되지 않았다. 세밀함과 개략적 묘사, 투명과 불투명한 색채, 입체와 평면 처리 등이 혼재되었다.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그의 고향 오스텐데는 카니발이 일상인 곳이다. 앙소르는 그 행렬의 형식을 빌려 군중과 그 속에 자신을 예수로 분장했다. 자기 스스로 벨기에의 예술을 빛낼 인물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기에 가능한 태도이다. 빛나는 후광과 나귀를 탄 예수(앙소르)는 팔을 뻗어 위엄을 과시한다. 군악대를 앞에 둔 그의 행렬이 오와 열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려 하나 구세주를 못 알아보는 무질서한 군중에 막혀 중심에서 밀려났다. 그 옛날 예수처럼 그도 군중으로부터 무시, 조롱, 매도당했다.

‘천여 명의 머리’로 꾸민 참신한 구성과는 별개로, 군중 자체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왼쪽 전경에 모자를 쓴 해골, 그 뒤 뽀뽀를 하는 중년의 남녀, 붉은 법복을 입은 판사,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군악대를 지휘하는 군인, 피에로 등등 무질서하다. 벨기에의 정치, 경제, 예술과 관련된 많은 인물을 각종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예수 주변에 있는 콧대 높은 인물들은 그를 무시하는 비평가처럼 보인다. 앙소르는 29년간 작업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얼굴을 차곡차곡 덧붙였다고 한다. 색채가 과감했던 이 대작은 '앙소르의 표현주의 선언'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모든 강박관념과 불안, 풍자와 야유가 뒤섞여 있다.


앙소르는 송곳처럼 날카롭기만 한 비평가를 비롯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벨기에 북서부 오스텐데에서 어머니 마리아 카타리나 하게만의 집에 얹혀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달리 아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마흔이 넘도록 다락방에서 붓질하고 있는 아들이 그저 답답해 보였다. 그녀는 위로의 말 대신 생계에 보탬이 되지 않는 자식을 힐책하며 “(기념품, 가면, 축제 의상 및 이국적 잡화를 취급하는) 가게에서 팔 수 있는 그림이나 그리라”고 면박을 주었다.

<임종한 어머니의 초상(1915)

다행히 그는 이 가게의 잡화에서 영감을 받아 '가면의 화가'라는 독창성을 평가받았다. 대한민국의 영화 <올드보이>에 출연한 <슬퍼하는 인간(1891)>을 그렸고, 다음 해 <절인 청어(불어 ‘아랑 소르)를 두고 싸우는 해골들(1892, 제목 사진)>을 통해 자신을 물어뜯는 비평가를 꼬집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조금씩 세상으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하던 1915년 향년 80세에 눈을 감았다. 앙소르가 황제 빌헬름 2세를 모욕한 죄로 체포당한 그해였다.

이때 남긴 작품이 <임종한 어머니의 초상>이다. 회색과 옅은 갈색, 파랑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저세상으로 떠나는 어머니의 윤곽선을 희미하게 칠했다. 그는 오랫동안 병든 어머니를 묵묵히 병간호했다. 병상에 성모 마리아상을 두어 어머니의 천국행을 염원했다. 이듬해 사랑하는 이모 미미마저 세상을 떠나자 1917년 그는 근처로 첫 이사를 한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기존의 1층 기념품 가게는 문을 닫은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 관리했다. 플랑드르 거리의 새집으로 이사하고 나서야 마침내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전체를 벽에 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감대로 작품은 대중의 외면을 받아 41년을 둘둘 말린 채로 지내다가 1929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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