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평론가에 의해 ‘파리파’라고 불렸던 무리가 있었다. 자유와 지적 분위기에 이끌려 파리로 온 타국 화가들이다. 자유분방했고, 구상 미술에 충실했으며, 대부분이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모이즈 키슬링, 마르크 샤갈, 쥘 파생 등이 그들이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리보르노에서 태어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스물두 살 때인 1906년에 동경하던 파리로 왔다. 당시 파리에는 273만 명이 살고 있었고, 전체 도로 길이는 973km에 달했다. 오스만이 설계한 큰길은 시민의 자랑거리였으며, 9,622개의 가로등과 약 50만 개의 전구가 ‘빛의 도시’ 파리의 밤하늘을 밝혔다. 그리고 1889년 만국박람회 이후 에펠탑은 지식인들의 비난을 극복하고 도시의 상징물이 되었다. 파리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요새로 바뀌었다. (도리스 크리스토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이즈음 미술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 파리에서 연이어 벌어졌다. 모딜리아니가 도착하기 직전 1905년에 야수파가 살롱 도톤느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06년에는 폴 세잔이 사망했다. 후기 인상주의자로는 고흐와 고갱에 이어 세 번째였다. 1907년 피카소가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렸고, 1908년에는 뭉크의 작품이 큰 반향을 몰고 왔다.
몽마르트르에서 피카소의 청색 시대풍의 색채와 로트레크의 선(線)을 즐겨 실험했던 모딜리아니는 늘 인물화를 그렸다. 피카소, 세잔, 로트레크와 교류하면서도 어느 특정 사조를 맹종하지 않았다. 손상되지 않은 인물의 형태를 선호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유행이 아니라 개성을 좇았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수집가의 호(好), 불호(不好)가 명백히 갈렸다. 차라리 현명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첫 번째 후원자가 폴 알렉상드르이다. 모딜리아니는 그의 소개로 마르그리트 드 아스 드 비예 남작 부인을 그렸다. 파리 상류사회의 초상화가로 성공할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노란 재킷을 입은 여인>에서 승마 재킷을 입은 남작 부인을 일러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마른 얼굴이 날카로운 것이 자신감이 넘친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다. 더 심하게 말하면, 흘깃 쏘아보는 시선에는 다소의 오만함이 풍긴다. 남작 부인도 이를 감지했는지 초상화를 거부하면서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결국, 알렉상드르가 지불했다. 부인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자신의 빨간 재킷을 노란색으로 그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이유의 전부였을까? 자기 내면이 솔직하게 드러난 탓일 수 있다.
이후 모딜리아니는 상류사회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1909년 그는 루마니아 출신 콘스탄틴 브랑쿠시 조언으로 회화에서 조각으로 돌아섰다. 그 역시 추상적인 조각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이후 그의 회화에서 독창성으로 자리 잡는다. 인물의 개성과 감성이 배제되고, 신체를 길게 왜곡하는 형태가 그것이다. 아몬드 모양의 두 눈과 좁은 입술, 유난히 긴 목과 가늘고 긴 손과 발. 그간 연구한 에트루리아 미술과 고딕 미술을 연상시키며, 세잔의 초상화와 아프리카 바울레 족과 아운데 족의 가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폐가 나빴던 그는 조각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열네 살에 장티푸스에 걸렸고, 열일곱 살에 결핵으로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다니며 요양해야 했다. 평생 병마에 시달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고 하였으나 건강 문제로 거부당하기까지 했다.
1912년 파리 가을 미술전에 출품했으나 주목받지 못했고, 초상화 한 점에 15프랑을 받으며 생활했다. 1917년 12월 그의 첫 개인전이자 생전에 열린 유일한 개인전이 파리의 라피트가의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열렸다. 몽상적 화상이자 폴란드 시인인 레오폴드 즈보로브스키가 주선했다. 나체화 개인전이었다. 이때 모딜리아니는 기대어 누운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베르트 바이유는 즈보로브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몹시 아름다운 누드 두 점을 창가에 걸어 놓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을 맨 처음 지나간 사람은 구역 경찰관이었다. (앙드레 살몽,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 작은 소요가 일어났고, 경찰은 그의 전시회를 금지했다. "사타구니의 체모까지 보이는 싸구려 그림"이라며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그림을 모두 압수하겠다고 했다. 모딜리아니는 이후 누드화에 접근하는 방법을 달리했다. 모델의 육체에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개성과 관능미를 상쇄시키는 효과와 함께 신비감을 불러일으켰다. 관객의 눈길을 피해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를 거들었다.
1916년 영국 작가 베아크리체 헤이스팅스와 2년간 지속되었던 열정적인 관계를 끝냈다. (롤프 스네이더르 외, <그림 속의 여인 100>) 이듬해 서른세 살이 된 모딜리아니는 ‘로통드’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열아홉 살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검소한 옷을 입고, 머리를 길게 딴 채 낮은 구두와 화장하지 않은 청순한 소녀였다. ‘느와 드 코코(코코넷 열매)’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녀는 모딜리아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도 술을 줄였으며 하시시는 거의 먹지 않았다. 하지만 슬픈 일은 모딜리아니가 때때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갔다. 미남으로 유명했던 그에겐 많은 여인이 따랐다. 그러나 그에게 잔은 영혼을 바친 마지막 사랑이었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을 비롯하여 모두 열여섯 점을 그렸다. 그의 독창성이 도드라진 작품들이다.
긴 코를 가진 달걀형 얼굴과 둥근 어깨선, 커다란 모자챙의 곡선과 잘 어우러진다. 특히 가볍게 얼굴을 받치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그녀를 우아하게 만든다. 검은색 모자와 의상, 짙은 갈색 머리칼은 안정감을 주고, 배경의 온화한 색조와 섞여 여인의 우수와 차분함이 느껴진다. 마티스가 보여준 콩고 가면과 고갱의 클루아조니슴(cloisonnisme, 색을 채운 평면을 검은색 윤곽선으로 둘러싸는 방식)을 사용하여 잔이 마치 성녀처럼 보이는 효과를 냈다. 그러나 두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 꿈꾸는 듯한 모습이다. 잔이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모딜리아니가 대답했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그때 눈동자를 그릴게.” (차홍규·김성진, <서양 미술 100>)
얼마 후 정말 잔의 초상화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 (제목 그림, 1919) 하지만 개인전이 실패로 끝나고, 경제적 고통과 폐병이 심해졌다. 독일군의 공격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4월,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를 여행했다. 즈보로브스키가 그림을 그려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한 여행으로, 샤임 수틴과 후지타가 동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요양을 겸했던 모딜리아니는 1918년 11월 니스에서 첫 딸을 낳았다. 행복을 느낀 것도 잠시, 겨울 땔감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이 극심해졌다. 1919년 잔은 친정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부모는 부유한 가톨릭 집안으로 모딜리아니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곁에 없는 잔과 딸이 보고 싶었다. 혼자 파리에 남은 그는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해 6월 잔느와 다시 만났고, 7월 7일 증인 앞에서 결혼할 것을 서약했다. 모딜리아니는 1918년 <젊은 작가전>에 피카소, 마티스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19년에는 <살롱 도톤느>와 영국에서 열린 <현대 프랑스 미술그룹전>에 출품했는데, 런던에서 결혼은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1920년 병석에 누운 모딜리아니는 1월 24일 결핵성 뇌막염으로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서른여섯 살이었다. 시체 안치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최후 대면을 한 잔느는 너무나 긴 입맞춤을 해 키슬링을 놀라게 했다. 충격을 받은 잔은 8개월 된 둘째 아이를 밴 몸으로 이틀 뒤 친정집 6층 건물 옥상에서 투신했다.
모딜리아니는 살아 있을 때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 고독을 베네치아 미술학교 다닐 때 배운 마리화나와 술로 달랬다. 전위 작품이 유행할 때 고집스럽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얄궂게도 그의 죽음에 관한 스토리와 연결되어 사후 명성이 높아졌다. 22점의 누드 작품 중 <소파에 앉은 누드>가 2010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6천9백만 달러(약 780억 원)에 팔렸다. 생전 그림값에 무려 500배 이상 뛰었다. 2015년 경매에선 <누워 있는 나부(1917)>가 무려 1억 7,400만 달러(1,972억 원)에 팔렸다. 당시 경매가(價) 사상 두 번째 비싼 경매 미술품이었다. 참 야속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 모딜리아니 가족의 요청에 따라 잔느가 같은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엄마의 이름을 따온 딸 ‘잔’이 그의 가장 중요한 전기작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