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랑쿠시와 콜더, 그리고 추상조각

by 노인영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일러 대리석에 숨어 있는 대상을 끄집어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 추상 조각의 아버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는 거꾸로 접근했다. 원석의 본래 모습을 잘 보존하면서 어떻게 대상을 연상케 할 수 있게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 해결 방안으로 추상 조각을 선택했다. 추상 조각은 추상화와 마찬가지로 본질만으로 단순화한다. 회화의 점, 선, 면과 색채를 대신하여 조각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티브’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브랑쿠시 키스 1910.png <키스(1923)>

예를 들어보자. 대표 작품 <키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본질은 입맞춤이다. 브랑쿠시는 둘이 입과 입을 맞춤으로써 하나 되는 형상을 단순화했다. 연작은 모두 네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 제작 연도와 관련, 의견이 분분하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니 무시하자. 여하튼 클림트의 회화 <키스>하고 좋은 비교를 보인다. 그림과 조각, 화려함과 단순함으로 나뉘지만, 행위의 강렬함에 있어서는 브랑쿠시가 클림트의 <키스>를 단연 압도한다. 클림트의 작품 속 여인에게선 주저하는 내색이 나타난다. 하지만 브랑쿠시의 연인은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둘이 붙어 틈이 없다. 완전히 한 몸이다. 남녀 모두 직사각형 형태인데, 여자는 머리를 길게 그리고 곡선을 강조했을 뿐이다. 입술과 눈이 포개졌는데 눈은 타원을 이루어 옆모습과 앞모습을 동시에 표현했다. 한 바퀴 감은 손이 재밌다. 생략과 응축 사이에 등장한 브랑쿠시의 유머다. 재료에 충실하면서, 공간미보다는 형태를 간결하게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그의 조국 루마니아 티르구지우에 들어선 <입맞춤의 문(1938, 제목 사진)>은 반(半)추상의 <키스>를 더욱 추상화했다. 그 의미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에서 인류의 사랑과 평화의 염원으로 격상했다.

<공간 속의 새(1923)>

<공간 속의 새>에는 추상 조각에 대한 이해를 돕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926년 미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파리에서 이 작품을 구입해 돌아오면서 면세품인 미술품으로 세관 신고를 했다. 그러나 세관원은 부리와 날개, 깃털이 달린 ‘새’를 발견할 수 없었다. 세관원은 광택이 나는 금속 조형물을 '주방용기와 병원용품'으로 분류하고, 230달러의 관세를 매겼다. 스타이켄은 세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에서 브랑쿠시는 "평생토록 나는 비상의 본질을 추구했다"고 증언했고, 스타이켄은 "미술가가 새라고 했으니 이것은 새"라 주장했다. 그러자 판사가 스타이켄에게 물었다.


"만일 사냥을 나갔는데 나무 위에 저것이 있다면 '새'라고 여기고 쏘았겠습니까?"


당황한 스타이켄은 대답을 못 했지만, 어쨌든 재판정은 (새를 연상하기는 어렵지만) ‘관람하는 즐거움이 있으며, 상당히 장식적이기에’ 미술품이라고 판결했다. 예술에 애정이 깊었던 판사였던 것 같다. <공간 속의 새>는 이렇게 미국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최초의 추상 조각이 되었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남자용 소변기에 사인하고 <샘>이란 이름으로 출품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사건이다. 브랑쿠시는 ‘새’ 연작을 27점이나 완성했다. 그중에 <공간 속의 새>가 16점이나 된다. 소재도 대리석부터 금속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내용면에서는 <키스> 보다 훨씬 더 순수 추상으로 기울었다. 그의 말 대로 새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새가 보여주는 ‘비상’이란 행위의 본질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했다.

브랑쿠시의 유년은 불우했다. 농사짓는 아버지는 방랑벽이 심했고 이복형제들과 불화가 잦아 몇 번씩 가출했다가 어머니에게 잡혀 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작품에서 현실을 탈출하려는 그의 자유의지를 발견한다. 작품은 하늘을 향해 로켓처럼 비상하는 새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형태에만 몰입하지 말고 작품을 둘러싼 공간까지 포함하여 감상하면, 파란 창공까지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키스>에 대한 잔상이 남아 있어서일까? 개인적으로는 새 두 마리가 부리를 맞대고 입맞춤하는 형상으로 보인다.


어렵게 공부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경건한 자세로 새로운 조각 양식에 열정을 기울였다. 브랑쿠시는 당대 저명한 로댕의 스튜디오에서 두 달간 일하면서 그로부터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로댕이 그의 뛰어난 재주를 인정한 거다. 하지만 그는 “거목 밑에 있으면 빛을 가린다”고 하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심 로댕의 작품이 재현에 머문다는 비판이 내재했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의 추상 조각은 1938년 티르구지우 기념공원에 기증한 <입맞춤의 문>과 함께 <침묵의 테이블>과 <끝없는 원주(193)>로 완결된다. 특히 <끝없는 원주> 연작의 반복 기법은 1960대 미니멀 아트에 영향을 끼쳤다. 이로써 브랑쿠시는 시대의 위대한 조각가 로댕의 둥지에서 벗어나 솔개처럼 비상했다.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스위스 출신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가 1925년경부터 반추상적인 인물의 입상(立像)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1950년 가늘고 긴 뼈대만으로 구성한 입상은 집중적으로 제작했는데, 인간의 절대 고독을 표현했다. 실존주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회화(1945)>를 통해 그의 입상들이 ‘인간 사이 서로 닿을 수 없는 거리’를 표현했다고 썼다. 그리고 1941년에 자신이 겪은 파두 포로수용소의 ‘정어리 상자’ 속에서 2개월을 보낸 체험을 떠올렸다.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콜더 암소 cow 1926.png
콜더 헬렌 윌스 Helen Wills 1927.png
콜더의 <암소(1926)>와 <헬렌 윌스(1927)>

한편 미국 작가 알렉산더 콜더(Alexander Calder, 1898~1976)는 조각에 움직임의 요소를 도입한 ‘모빌(mobile)’을 창시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조각가인 아버지와 초상화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이미 철사, 판금, 나무와 같은 재료로 동물을 만들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목도하고 예술에 관한 욕구가 깨어났다. 1923년 뉴욕의 미술학교(Art Students League)에 등록했고, 1926년에는 런던을 거쳐 파리에서 유학했다. 서커스 공연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붓 대신 철사를 사용하여 독창성을 보였다.

대상의 특징을 꼭 집어낸 캐리커처 같으면서도 유머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예를 들어 <암소>에서는 우유를 생산하는 젖과 소똥이, <헬렌 윌스(1927/1928)>에서는 낮은 공을 치는 날씬한 여인의 역동성이 도드라진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철사를 사용했을 뿐이지 작품은 조각이기보다 소묘 성격을 띠었다. 연필로 선을 긋듯 형태만을 강조했다. 인기를 얻은 그는 뉴욕, 파리, 베를린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호안 미로, 마르셀 뒤샹, 페르낭 레제, 피에트 몬드리안 같은 전위 예술가들과 우정을 쌓았다. 특히 1930년 파리의 몬드리안 작업실을 방문하여 기하학적 추상화를 보고 추상 조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콜더 모빌 1932.png
콜더 세 개의 디스크 인간 1967.png
<모빌(1932)>과 스태빌 <세 개의 디스크(인간, 1967)>

철사의 평면성을 3차원으로 확장했다. 가는 줄기 모양의 조각품은 바닥이 붙어 있지 않고 천장에 매달린 채 공중에 떠 있다. 따라서 구조물은 자연스럽게 공기의 진동에 의해 움직임이 나타난다. 조각의 부동성(不動性)을 거부한 작품이다. 뒤샹이 그의 움직이는 작품들을 일컬어 1932년 ‘모빌’이라 명명했다. 키네틱 아트(Kinetic Art, 작품 그 자체가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을 넣은 예술작품)의 한 예로, 조각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며, 아이들이 재미를 느끼는 팝아트를 예견한 추상 조각품이다. 그러나 콜더의 제작 의도는 장난스럽지 않고 무겁다. 평형을 이루며 끊임없이 예측이 불가능하게 패턴을 바꾼다는 측면에서 우주를 재현했다. 하지만 작품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예술적으로 가볍다는 반응이 나타났다.

그러자 후기에 들어서면서 보란 듯이 다시 한번 변신한다. 지상에서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추상 조각품을 완성한 것이다. 조각가 장 아르프가 모빌과 대비, ‘스태빌(stabile)’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정적(靜的) 조각 작품임을 강조한 작명이다. 말년 스태빌 작품 <세 개의 디스크>는 캐나다 몬트리올 엑스포 '67을 기념했다. 높이가 무려 65피트로, 콜더의 대형 조각품 중 하나다. 비록 고정되었지만, 원형 곡선과 삼각형 직선이 교차하며 여러 방향으로 흐르는 기하학적 아치 형태가 여전히 역동적이다. 이와 같은 거대한 스태빌은 전 세계의 도시 공간에 설치되면서 20세기 후반 공공미술의 확산에 기여했다. 이후 추상 조각은 영국의 헨리 무어(Henry Spencer Moore, 1898~1986)가 등장하여 유럽의 조각 전통을 거부하고, 원시 미술에서 이상적인 모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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