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임 수틴과 작품가(價)

by 노인영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가격’이다. 생전에 오직 한 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400프랑(한화 약 10만 원)에 팔았던 고흐가 죽기 전 1889년 동생 테오에게 편지로 물었다.


"어제 밀레의 <안젤루스>가 50만 프랑에 팔렸어. 그런데 대중이 밀레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가졌던 생각에 공감한다는 걸까?"


<가죽을 벗긴 소(1925)>

리투아니아 출신 표현주의 화가 샤임(혹은 생) 수틴(Chaïm Soutine, 1894?~1943)의 <가죽을 벗긴 소>이다. 채도가 높은 색을 사용하여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를 패러디했다. 그가 존경하는 렘브란트에게 헌정하는 그림으로, 장렬한 죽음을 형상화했다. 그런데 이 작품이 2006년 소더비 경매에서 대박을 터트렸다. 당시로선 생소했던 작가였는데 무려 13,773,240달러, 당시 한화 150억 원이 넘는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우연일까?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1655)>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은 상징을 내포했다. 동물의 사체에서 고깃덩어리가 주는 느낌은 인간의 것과 차이랄 게 없다. 렘브란트는 해체된 소를 통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간의 삶이 덧없음을 암시했다. 그는 생전에 100여 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그렸다. 돈이 없다기보다 잘 나가던 젊은 시절에도 그는 자기 내면을 끝없이 탐구했다. 따라서 <도살된 소>는 렘브란트의 철학적 자화상이라 할 수 하다. 같은 맥락에서 내면의 탐구에 천착했던 표현주의자 샤임 수틴이 렘브란트의 작품에 천착한 것은 자연스럽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에게 심취하면서 선명하고 강렬한 빨강, 초록, 노랑의 원색을 사용했다. 그리고 형태를 심하게 왜곡시켜 긴장감을 준다.


수틴은 파리 14구역 몽파르나스 '라 뤼슈(La Ruche, '벌집'이라는 뜻)'의 아틀리에서 지냈다. 말이 아틀리에이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후 철거되지 않아 무너질 듯한 건물로, 근처 도축장에서는 악취가 풍겨 나왔다. 자연스럽게 가난한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르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만큼 환경이 더욱 열악했다는 뜻이다. 그는 이곳에서 같은 유대인인 모딜리아니, 샤갈과 특히 친했다. 모두 파리의 이방인이자, 자기만의 작품 세계에 대한 고집이 대단했다. 말 도살꾼과 진한 우정을 나누었던 수틴은 죽은 소의 살덩어리가 주는 색채를 표현하기 위해 무려 40여 개의 붓을 사용했다. 한 번은 가져다 놓은 소 옆구리 살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기겁한 옆집에서 경찰을 불렀다. 그런데 수틴은 경찰에게 자신은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며 일장 연설을 했다고 한다.

<가죽을 벗긴 소>는 모딜리아니와 함께 시테 팔기에르 14번지, 몽파르나스 거리를 넘어서 보자르가(街)에 살고 있었을 때의 작품이다. 그때 매달려 있는 소를 천천히 그렸는데, 그림을 완성하고 난 후 부패된 소의 처리가 문제였다. 악취는 시테 팔기에르에서 보자르가까지 펴져나가기 시작했다. 파리떼들이 제 철을 만나기로라도 한 듯 몰려들었다.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수틴의 운반을 모딜리아니가 도와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죽은 소의 행방은 신만이 알 뿐이다. (앙드레 살몽,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 한 마디로 반항적이면서 격렬한 표현주의 화가였다. (제목 사진은 모딜리아니가 그린 <샤임 수틴의 초상(1917)>이다)

<붉은 스카프를 두른 남자(1921)>

이듬해인 2007년 소더비에서 샤임 수틴의 <붉은 스카프를 두른 남자>가 피카소, 르누아르, 세잔, 드가 등 쟁쟁한 화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출품했다. 그리고 물감을 수없이 덧바르며 인간의 살이 주는 질감을 표현한 이 작품은 최고 낙찰가 17,236,220달러(약 195억 원)를 기록했다.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재밌는 것은 <가죽을 벗긴 소>가 2015년 경매에 다시 나타나 28,165,000달러, 한화 약 360억 원에 낙찰되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최고가가 이렇게 반복되면, 그건 우연이 아니다. 수틴의 작품이 강력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인’이었다. 폴란드 옆에 위치한 벨라루스 민스크 지방에서 태어난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이었음에도 유대교 전통에 저항했고 집안의 반대에도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수틴은 고독했고, 번민을 거듭했다.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전시회에 참여하지 않아 지명도가 떨어지고 작품이 안 팔려 가난은 멈출 줄 몰랐다. 몽파르나스 가난한 화가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하지만 사색은 멈추지 않았다. 그림이란 대관절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의 내면은 도대체 어찌 생겼는가? 계속해서 질문했으리라. 사실적인 재현으로는 그 이미지를 도저히 담을 수 없었다.

다행히 1923년 미국의 부유한 후원자 앨버트 반스 등을 만나면서 그의 형편이 풀렸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시중 받는 입장이 되자 죄의식을 느꼈을까? 적은 돈을 벌면서 고된 일을 하는 식당 종업원을 캔버스에 담았다. <가죽을 벗긴 소>에서처럼 자화상에서도 자신만의 강렬한 그림에 천착했다. 고뇌하는 자신은 물론 주변 세상까지 격정적으로 표현했다. 수틴과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다. ‘화가들의 화가’로 불릴 만하다. 특히 잭슨 폴록, 프랜시스 베이컨, 윌렘 데 쿠닝이 감명받았다. 친구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화상 즈보로브스키에게 결코 수틴을 저버리지 말라며 당부했던 말이 생각난다.


"걱정할 것 없네. 나는 자네에게 수틴이라는 천재를 남겨 놓고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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