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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15. 2023

사실과 믿음 사이; <천문학자>와 사제 르메트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천문학자>

베르메르의 <천문학자(1668)>

17세기 네덜란드의 사실주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천문학자>다. 스페인에서 독립하여 해양 대국으로 번성한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와 과학이 가져온 변화를 담았다. 골동품상을 운영했던 아버지 덕분에 마련한 배경 소품은 작품 속 인물의 직업적 특성을 나타낸다. 천체의(儀)의 특정 별자리를 가리키는 듯한 손, 펼쳐 놓은 책과 뭔가를 비교해 보는 듯한 모습, 전문가다운 풍모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이 천문학자라기엔 망원경이 없다. 그래서 점성술사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듬해 그린 비슷한 작품을 근거로 지리학자(제목 그림 참조)라고도 했다. 심지어 자화상을 그리지 않아 얼굴을 몰랐던 베르메르 자신이 아니겠느냐는 추측까지 생겼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와 철학자 스피노자와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가 거론된 것이 흥미롭다. 그중 레벤후크는 베르메르와 같은 해, 같은 고향 델프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목상인 밑에서 일했으나 현미경을 만드는 재주가 비범했다. 배율이 300배가 넘는 당대 최고의 현미경을 만들어 미생물 세계를 관찰했다. 마흔 무렵부터 시작한 아마추어 연구자 생활 50년 동안 논문을 무려 200여 편이나 영국 왕립학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1676년, 빗방울 속에서 최초로 원생동물을 발견하면서 그 한 방울 속에 828만 마리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로써 레벤후크는 훗날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한편 작품 속 오른편 벽에 걸린 그림이 재밌다. 아기 모세를 나일강에서 발견하는 장면인데, “새로운 과학의 등장을 은유한다”는 평가다. 모세가 이스라엘 지배자로 선택된 데에는 사막에서의 그의 경험과 지식이 작용했다는 관점과 연장선에 있다. 그렇다면, 모세가 홍해가 갈라지는 신비한 자연 현상을 이미 꿰뚫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척박한 사막에서 무지한 백성들의 생존을 담보해 내기 위해 ‘기적’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제갈공명의 ‘동남풍’처럼.



종교는 과학이 답을 해줄 수 없는 삶의 영역에서 많은 사람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둘 사이에는 골이 깊게 파였다. 일차적인 책임은 종교의 경직성에 기반한다.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 학회'가 ‘오르페우스교’라는 종교 집단으로 변하면서 히파소스를 죽였다. 정수로 설명되지 않는 수, 즉 무리수(irrational number)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외부에 누설했다는 이유였다. 서기 415년에는 북아프리카의 고도(古都) 알렉산드리아에서 여성 최초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히파티아가 살해당했다. 플라톤학파의 수장이던 그녀는 기독교 신자도, 그렇다고 이교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키릴루스 주교의 눈에 그녀는 이교도의 전형이었다. 납치되어 굴 껍데기로 살갗을 벗겨진 채 산채로 불 속에 던져졌다. 이외에도 중세에서 근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종교재판을 통해 학자들의 소신이 짓밟힌 경우는 일일이 소개하기가 새삼스럽다. 

다행히 두 영역을 중재할 인물이 존재한다. 위대한 과학자 맥스웰은 여느 신학자만큼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의 진정한 실체는 오직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뉴턴과 패러데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발견을 신의 거대한 설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그랬음에도 과학과 종교 사이의 공통 기반을 세우려는 빅토리아 협회의 가입 권유를 거절했다. 1875년에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가 과학과 종교성을 일치시키려는 노력 끝에 성취한 결과는 본인 외 그 누구도 의미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낸시 포브스와 배질 마흔 공저 <패러데이와 맥스웰>)


동시에 과학적 연구에서 실험으로 뒷받침하지 않은 이론은 임시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절대적 믿음을 요구하는 신앙과 물질적 증거를 요구하는 과학을 지혜롭게 양립한 것이다. 비결은 성경 해석 방법에 있었다. 맥스웰은 신이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세기>의 설명을 진리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은유이며, 성경의 다른 구절 역시 메시지로서 존재한다고 여겼다.

 

벨기에의 예수회 사제 조르주 르메트르의 경우 역시 예사롭지 않다. 그는 그는 ‘영원히 변치 않는 우주’를 버리고 일반상대성이론의 장 방정식을 우주론에 적용한 선구자다. 그의 수학적 아이디어는 우주 팽창과 함께 역으로 우주를 수축할 경우 초기 원시우주에 대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그의 우주 팽창론을 열렬히 지지했던 스승 에딩턴조차 원시우주와 관련해서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이론을 지나치게 확장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1929년 허블에 의해 우주 팽창이 과학적 사실로 드러난 이후 르메트르는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과학 저널 <네이처>에 ‘양자이론의 관점에서 본 세계의 시작(1931)’이란 제목으로,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여전히 중립적인 물리학 법칙에 근거했다. 

1933년 겨울, 아인슈타인은 패서디나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열린 르메트르의 두 차례 강연을 모두 들었다. 강연 말미에 아인슈타인이 뜻밖에 반전을 보여주었다. “이제껏 들어본 창조에 대한 설명 중에 가장 아름답고 만족스럽다”며 그의 급진적인 논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원시원자설이 기독교 창조설과 너무 흡사하다고 여겼다. 그럴 경우 우주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겠다는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사제 르메트르는 “원시원자 가설은 종교적 창조설을 대체하는 과학적 논리”라고 거꾸로 아인슈타인을 설득했었다. (토마스 헤르토흐, <시간의 기원>)  


그는 방향을 바꿔 이번엔 교황 비오 12세를 (간접적으로) 설득했다. 1951년 11월 12일, 당시 과학적 분위기에 힘입은 교황이 연설을 통해 “빅뱅 이론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확증한다”고 선언했다. 위험한 말이라고 판단한 그는 교황이 신중해지길 요청했다. 르메트르는 성서가 물리학에 대해서 모르고, 물리학이 하느님에 대해 모른다는 입장이었다. 다행히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교황은 다신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이번에도 그가 옳았다. 오늘날 많은 이가 빅뱅 이전에 또 다른 우주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교회가 훗날 난처해지는 상황이 조성될지 모를 일이었다.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교황의 말은 격이 다르다. 신자들은 교황이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유일한 인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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