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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10. 2023

칸딘스키와 아인슈타인의 실수, 그 결과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인상 3(콘서트)>

1895년, 서른 살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그의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두 가지 경험을 한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파 전에서 모네가 그린 <건초더미(1891)>를 보았다. 관행적으로 색을 선택했던 그로서는 처음으로 ‘그림다운 그림’을 보면서 마술 같은 색채의 미학에 빠져들었다.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 국립 극장에서 열린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 그린> 공연이었다. 소리와 함께 색들이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 그러자 미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력할 뿐만 아니라 음악이 지닌 질서와 힘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타르투 대학의 법학 교수직을 물리치고 회화에 몰입했다.


칸딘스키의 <인상 3(1911)>

초기에는 풍경화나 민속화에서 얻은 영감을 주제로 구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그는 곧 대상과 상관없이 단순한 형태와 선명한 색채를 활용하여 감정 표현의 영역을 확장했다. 여기에는 그의 조그만 실수가 계기로 작동했다. 어느 날 그는 아틀리에로 돌아와 작품 한 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꾸로 놓인 자기 풍경화에서 생경함을 느낀 것이다. 그는 깨달았다. 아름다움은 점, 선, 면, 색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1911년 칸딘스키는 쇤베르크 무조(無調, 장조나 단조의 규칙이 없는) 음악에 감명받고 편지와 함께 그림을 선물했다. <인상 3(콘서트)>이다. 검은색은 피아노를, 청중을 둘러싼 노란색은 감동의 클라이맥스를 표현했다. 색채나 소리 모두 전자기파의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본질은 같다. 음악은 듣는 것이지만, 칸딘스키가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추상 미술이다. (제목 그림; 본격적인 추상 미술로 들어가기 직전 칸딘스키의 <교회가 있는 산 풍경(1910)>



과학에서의 실수는 인류의 미래 예츠에 치명적일 수 있다. 대중에게 알려진 아인슈타인의 가장 큰 실수에 관한 이야기는 둘로 갈린다. ‘우주상수(常數)’와 원자탄이다. ‘가장 큰’ 실수라는 말은 ‘하나’라는 뜻이 함축되었다. 그러니 아인슈타인의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고 하겠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장 방정식’은 우주의 진화를 예측한다. 가장 극적인 예가 우주 팽창과 블랙홀의 존재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우주 팽창 문제로 당혹했다. 결국, 직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안정적인 우주를 고수했다. 방정식에 우주상수를 도입한 것이다. 스스로 이론의 단순성을 포기하고 복잡한 체계를 구축했다. 1927년, 벨기에의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 1894~1966)가 우주가 팽창한다는 논문을 <브뤼셀과학협회 연보>에 실었다. 동시에 복사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알려준 스승 아서 에딩턴에게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벨기에어로 쓰인 논문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에딩턴은 제자의 논문을 서랍 속에 넣고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해 10월, 정식 초청장을 못받고 지인의 도움으로 솔베이 회의에 참석한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에게 ‘우주가 정적(靜的)이지 않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신의 계산은 옳지만, 당신의 물리학은 형편없소.” (페드루 G. 페레이라, <완벽한 이론: 일반상대성이론 100년사>)


그나마 러시아의 수학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Alexander Friedmann, 1888~1925)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를 무력화하고 팽창하는 우주 모형을 제시한 프리드만의 계산이 틀렸다는 편지를 물리학 잡지에 보냈다. 이후 프리드만은 계산 못 하는 수학자로 낙인찍혔다.

허블이 사용한 '표준 랜턴' 세페이드 변광성 중 하나인 '고물자리 RS'

1929년, 에드윈 허블(Edwin Hubble, 1889~1953)이 우주 팽창과 관련 직접적인 증거를 내놓았다. 허블은 윌슨산 천문대의 100인치 망원경으로 안드로메다은하의 성운들을 관측했다. 이미 거리를 알고 있던 24개를 기준점으로 총 46개 성운의 적색편이를 세밀하게 측정했다. 적색편이는 성운의 스펙트럼선이 파장이 긴 쪽으로 몰리는 적색이동 현상으로, 거리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관찰 결과, 은하가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으며 그것도 멀리 있는 은하가 더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당황한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the biggest blunder)'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언급은 우크라이나 출신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George Gamow, 1904~1968)의 자서전에 딱 한 번 등장한다. 그의 증언은 아인슈타인과 친분이 두텁지 않아 신뢰성에서 의심이 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미국의 물리화학자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 1901~1994)은 아인슈타인이 죽기 1년 전인 1954년 11월에 자신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나의 한 가지 커다란 실수(one great mistake)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원자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실제 아인슈타인은 1939년 8월, 헝가리 태생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Leo Szilard, 1898~1964)의 방문을 받았다. 질라드는 비밀 서신을 보여주었다. 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나치에 앞서 미국도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과학계 거인의 공감과 명성을 보탠 아인슈타인-질라드의 서신은 1941년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가 가동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아인슈타인은 원자탄 사용을 반대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연극의 1막에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된다”고 했다. 개발된 핵무기를 그냥 거둬들이기에는 인류가 그만큼 순진하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폴링은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받은 이채로운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오펜하이머로부터 ‘맨해튼 계획’의 화학 부문 책임자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전쟁이 끝난 1955년에는 핵무기에 반대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11명의 과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동참했다. 그리고 전 세계 과학자들의 지지를 모아 유엔에 추가 핵실험 중지를 청원했다. 

인간은 죽음을 코앞에 두면, 비로소 삶에 진지해진다. 이때의 아인슈타인에게 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는 개인적인 ‘성과’보다 ‘가치’라고 보는 게 옳다. 자기 행동에 대한 후회를 절대 멈추지 않았던 그는 말년에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배관공이 되겠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인슈타인의 가장 큰 실수는 원자탄 개발과 관련해서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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