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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01. 2023

“넌 과학이 재밌니?” 고갱과 힉스입자

폴 고갱의 <어머! '너 질투하니?>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화가다. 고흐의 비참한 죽음과 중첩되어 인간적인 비난이 집중된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그는 고흐보다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1888년 고흐와 함께 지냈던 아를의 공동체 ‘노란 집’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페루에서 성장한 그가 태생적으로 원시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마다가스카르로 가려했다. 그러나 문명 세계와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행선지를 타히티로 바꿨다. 1891년 6월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 도착했다. 고갱은 프랑스 식민지인 이곳에서 유럽의 문명을 모방하려는 값싼 속물근성을 마주했으나 원주민과 동화하려 애썼다. 몇 달이 지나면서부터 제법 마음에 드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고갱, <어머! '너 질투하니? (1892)>

이즈음 재밌는 제목의 그림 한 점을 완성했다. 두 젊은 여인이 해변에 있다. 한 여인이 방금 목욕을 마치고 관능적인 포즈로 누워 지난밤에 나눈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다가올 사랑에 대해 들떠 있다. 그러다가 한 여인이 돌아앉으며 묻는다. <어머! '너 질투하니? (1892)>. 바닥 풀밭이 밝은 분홍색이다. 검은 피부와 전통 의상 파레오가 도드라진다. 고갱은 “조화를 위해서라면, 색을 임의로 사용할 권리가 화가에게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발상은 야수파를 비롯하여 현대 미술에 영감을 주었다. (제목 그림; 고갱의 <언제 결혼하니?(1892)>)



“넌 과학이 재밌니?”라는 글의 제목은 고갱의 그림에서 차용했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 이유는 재미없어 보이는 입자물리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함이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라는 화두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오늘날 입자물리학까지 이어져 왔다. 과학이 단순한 응용 기술이 아니라 자연관이라는 방증이다. 또한 믿음의 수준에서 증거의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의미다. 여하튼 최소한의 존재라 믿었던 원자는 계속 쪼개지고 있었다. 표준모형이 완성되면서 기본적인 틀이 드러났다. 태곳적 질문에 대한 최초의 모범답안이다. 중력을 제외한 세 가지 힘(전자기력, 강력, 약력)과 입자의 상호작용을 설명했다. 그러나 너무 번잡하다. 19개의 변수와 36개의 쿼크-반쿼크, 뉴트리노, 글루온, 힉스 보존, W와 Z-보존 등 수많은 입자들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2018)은 이를 가리켜 ‘엉성한 임시변통’이라고까지 했다. (미치오 카쿠, <불가능은 없다>) 

그러나 성능 자체는 아직 이만한 것이 없다. 가볍게 정리하자면, 우주의 입자들은 물질을 구성하는 페르미온(fermion)과 힘을 운반하는 보손(boson)으로 나눌 수 있다. 페르미온은 다시 쿼크(quark, 근본 입자)와 렙톤(Lepton, 경입자)으로 구분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물질의 최소 단위는 쿼크다. 1963년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1929~2019)에 의해 개념이 탄생했다. 세 개의 쿼크가 모여 양성자와 중성자가 되며, 글루온이 결합을 돕는다.

 

입자가속기는 138억 년 초기 우주를 확인하는 블랙박스로, 실험을 통해 양자이론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검증했다. 쿼크 이론을 뒷받침하는 실험적 증거 역시 입자가속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사이클로트론은 미국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런스(Ernest Orlando Lawrence, 1901~1958)의 상상에서 출발했다. 전자나 양성자 같은 하전 입자를 강력한 전기장이나 자기장 속에서 가속해 원자핵과 충돌시킨 후 입자들의 운동에너지, 위치, 운동량 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속 방법에 따라 크게 선형과 원형 가속기로 나눈다. 1974년 리히터(Burton Richter, 1931~)가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로 참 쿼크를 발견하여 노벨상을 받았다. 선형 가속기는 고르고 센 입자 빔을 얻을 수 있고 에너지 손질이 적다. 하지만 입자의 에너지가 커질수록 가속기 길이를 늘여야 한다. 그 한계를 보완하고 한정된 공간에서 가동할 수 있는 나선형 사이클로트론이나 원형 베타트론과 싱크로트론으로 발전했다. 로런스가 1931년 1월, 양성자를 8만 전자볼트(eV)로 가속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이듬해 양성자 입자가속기 사이클로트론을 최초로 만들었다. 

CERN(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

1959년에는 유럽 11개국이 참여한 CERN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싱크로트론(LHC, Large Hadron Collider)을 만들었다. 지름이 9km, 둘레가 27km다. 그 결과, CERN은 1983년에 W와 Z 보손을 잇달아 발견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 입자물리학자들이 표준모형의 마지막 퍼즐 ‘신의 입자’ 힉스((Higgs) 보전을 찾는 데 집중했다. 이때 제기된 프로젝트가 SSC(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초전도 초대형 충돌기) 건설이다. 최초 44억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 망설이던 레이건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내리면서 작가 잭 런던의 글을 인용했다.  


“나는 내 삶의 활기가 시들어 말라버리는 곳보다, 완전히 타서 재가 되는 쪽을 택하겠다.” 

 

10억 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텍사스주의 엘리스 카운티가 최종 부지로 결정되었다. 1만 7,000 에이커에서 초대형 공사가 시작되었고, 2,000명이 넘는 물리학자들이 SSC에 자신의 미래를 걸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비용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클린턴이 취임한 후 미 의회는 소련과의 냉전이 끝난 마당에 입자가속기 경쟁에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1993년 의회는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국제 우주 정거장 건설에 250억 달러를 배정하는 대신, 80억 달러로 불어난 SSC 프로젝트를 중단하기로 했다. 둘레 54마일(86km)에 달하는 건설을 위해 파 놓은 23km의 지하터널을 메우는 데 별도 예산 20억 달러가 책정되었다. 레이건에게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설명한 바 있던 리언 레더먼은 <신의 입자> 서문에서 이와 관련한 소회를 밝혔다.  


“우리는 신의 마음을 읽는 것보다, 국회의원의 마음을 읽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과학은 과학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사례다. 2012년 7월 4일, 가설 속의 ‘신의 입자’ 힉스 보존이 48년 만에 드디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물론 진원지는 제네바에 있는 CER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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