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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20. 2023

기요맹의 복권과 우주배경복사

인상주의 화가 중에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 1841~1927)이라고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다. 그는 생활고 때문에 그림 공부를 하면서 삼촌의 란제리 가게에서 일했고, 파리-오를리앙 철도 회사나 시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피사로가 부른 세잔을 따라 퐁투아지에 합류했다. 낮에 그림을 그리면서, 저녁에는 도랑 파는 일을 하는 기요맹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긴 피사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성실했던 기요맹은 인상주의 전시 여덟 번 중 여섯 번 출품했다.

 

기요맹의 <건초더미(1895)와 모네의 <아침의 건초더미, 눈의 효과(1890~91)>

그러나 기량에서는 어쩔 수 없는 차이를 보였다. 모티브가 같은 그의 <건초더미(1895)>를 모네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그는 보기 드물게 파리 교외에서 벌어지는 급격한 산업 변화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작품에서 공장, 건설 현장, 노동자들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고흐가 이런 그를 존경했는데, 기요맹의 그림을 액자에 끼워 놓지 않았다고 자신을 치료하던 가셰 박사와 크게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 살에 사촌 마리와 결혼하면서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그러다가 1891년에 공공복권에 당첨되었다. 10만 프랑의 거금을 손에 쥐게 되면서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지구 나이가 46억 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무 나이테에서 방사능 원소의 반감기를 이용하면 정확한 추정이 가능하다. 각 원소가 붕괴 속도에서 고유의 값을 지니고 있어 ‘시계’ 역할을 한 격이다. 그럼, 우주의 나이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초기 우주에는 원소는 물론, 구성체인 전자, 중성자, 양성자도 형성되지 않았는데···. 

이 숙제를 해결하는데 슬며시 다가온 행운이 있었다. 우주배경복사(宇宙背景輻射)의 발견이 그것이다. 우주배경복사는 초기 대폭발로 인해 생긴 ‘우주 태초의 빛’이다. 모든 물체는 뜨거워지면, 열과 빛을 방출한다. 복사(輻射, radiation)는 열을 받거나 잃을 때 에너지 준위가 바뀌면서 내는 전자기파를 말한다. 여러 가지 파장 또는 진동수를 가진 빛으로 구성되었으며, 빛의 세기와 색깔은 온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쇠나 도자기 가마가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걸 보았을 텐데, 이것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열의 복사 현상이다. 우주배경복사는 전자기파 스펙트럼 중에서도 가장 극단의 초단파다.


1964년 미국 뉴저지에 있는 벨연구소에 근무하던 전파 천문학자 로버트 윌슨(Robert Woodrow Wilson, 1936~)과 아노 펜지어스(Arno Allan Penzias, 1933~)가 처음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했다. 전자기파를 찾던 그들은 크기 6m 전파 망원경의 나팔 모양의 안테나(대문 사진; 홀름델 혼 안테나)에서 들려오는 한 가지 잡음에 시달렸다. 안테나 안에 둥지를 튼 비둘기 배설물까지 제거하는 등 1년 넘게 노력했으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모든 방향에서 일정하게 감지되는 잡음은 온도가 3.5K(캘빈, 절대온도, 섭씨 -269.65도)였고, 주파수가 4,080메가헤르츠였다. 

펜지어스가 친구인 MIT의 버나드 버크 교수에겐 도움을 청했다. 버크는 다시 벨연구소로부터 50km 떨어진 프린스턴 대학교의 로버트 디키(Robert Dicke, 1916~1997)에게 전화했다. 펜지어스와 이야기를 나눈 디키는 두 사람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를 즉각 눈치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디키와 함께 짐 피블스, 데이비드 윌킨슨이 그렇게 찾으려고 애를 써왔던 우주배경복사였기 때문이다.

 

곧바로 <천체 물리학 저널>에 두 편의 논문이 실렸다. 잡음과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한 윌슨과 펜지어스의 3쪽짜리 짧은 논문과 그 정체를 규명한 디키 연구진의 논문 <우주 흑체복사(1965)>였다. 물체가 내는 복사(빛)는 두 가지다. 물체 자체적으로 발광하거나, 다른 곳에서 도착한 빛을 반사하는 경우다. 흑체는 모든 빛을 완전히 흡수하여 검은색을 띠는 이론적 실체다. 따라서 흑체의 빛은 자체적으로 발산하며, 오로지 온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디키의 논문이 바로 물체를 가열할 때 나오는 빛의 파장과 온도의 상관관계를 추적한 것이다. 결국, 잡음의 온도를 통해 그것이 비둘기 똥이나 안테나 고장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초기 우주의 ‘화석’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무엇인지 몰랐고,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지도 않았던 윌슨과 펜지어스는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사실 20여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의 윌터 애덤스와 앤드류 맥켈러가 마이크로웨이브 수신기를 이용해 절대온도 2.3K 복사를 이미 발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이 우주 대폭발의 잔해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두 사람의 행운은 복권에 당첨된 화가 기요맹과 결을 같이한다. 하지만 행운도 성실이 극에 달한 사람에게 다가와야 삶을 여유롭게 하는 기제로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당시에는 정상우주론과 대폭발(Big Bang) 우주론이 팽팽하게 맞설 때였다. 정상우주론은 우주가 평형을 이루며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이. 따라서 우주가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하다는 논리와 연결된다. 반면 조지 가모브가 대표하는 대폭발 이론은 한 점 우주가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팽창했다는 이론이다. 

대폭발 이론에 의하면, 초기 우주는 밀도와 온도가 지금과 달리 매우 높았다. 따라서 원자의 양성자와 중성자가 그 하부구조인 쿼크와 접착 입자로 분해되어 뒤죽박죽 섞여 있는 플라스마 상태였다. 플라즈마(plasma)는 고체, 액체, 기체 이외에 물질이 취할 수 있는 ‘제4의 상태’를 말한다. 지구에서 보면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우주적 스케일에서 보면 가장 흔한 상태다. 네온사인이 플라즈마 상태를 이용하는 사례이며, 어떤 섬유에 손을 댔을 때 손가락이 찌릿하게 느껴질 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팽창으로 인해 우주의 뜨거운 온도가 점차 내려가 약 3,000K가 되었을 때 열복사가 발생했다. 전자 내부에서 강한 결합으로 꼼짝 못 하다가 최초로 자유를 얻은 빛, 곧 우주배경복사이다.

COBE 위성이 촬영한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의 사진(출처: 위키백과)

미 항공우주국(NASA)은 지구의 대기 등에서 발생하는 왜곡을 극복하고 좀 더 순수한 우주배경복사를 탐사할 필요를 느꼈다. 1989년 11월 18일, 우주배경복사 탐사선(COBE)을 발사했다. 그리고 이듬해 탐사선의 ‘원적외선 절대 분광 광도계’가 탐사 결과를 보내왔다. 디키 연구진의 예측대로 “우주배경복사가 우주를 고루 채우고” 있었다. 그 온도는 2.725K였고, 파장은 흑체복사 곡선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빅뱅 이후 ‘최초의 빛’이 방출되는 시기까지 우리 우주는 고온의 열평형 상태가 유지되다가 온도가 내려가 2.725K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이로써 호일의 정상우주론은 관에 못을 박았고, 대폭발 우주론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우주배경복사의 스펙트럼을 통해 우주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약 138억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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