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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01. 2023

패러다임의 전환, 뒤샹과 찰스 다윈

마르셀 뒤샹의 <샘(1917)>

마르셀 뒤샹의 <샘(1917)>

당신이 이 작품을 보고 “어떻게 변기가 예술품이 될 수 있어?”라고 반문한다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의도에 부합한다. 뒤샹은 미국 ‘아모리 쇼’에 단지 위치만 바꾸어 놓은 소변기를 출품했다. 그것도 직접 만든 게 아니라 기성품을 그대로 활용했다. 물론 ‘R. MUTT 1917'이라고 써놓긴 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단순하지 않다. 소변기의 기능과 가치를 전도함으로써 예술품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면서 “누가 예술을 규정할 자격이 있느냐?”라고 화두를 던진 것이다. 이후 미술에서 ‘레디메이드(기성품)’란 말이 생겼다. 뒤샹은 튜브형 유화물감도 기성품으로, 결국 모든 화가는 기성품의 보조를 받는다는 입장이었다. 

전위예술가, 특히 입체주의 화가들의 독선적 태도에 회의를 느꼈던 그는 회화를 캔버스에서 탈출시켰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예술 작품에서 작가의 생각이 중요해졌다. 이른바 ‘개념미술’의 탄생이다. 그러나 전시회를 주관한 앙데팡당미술가협회는 '결코 미술 작품으로 간주할 수 없다'며 '점잖지 못한 물건’의 전시를 거부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뒤샹은 협회를 탈퇴했고, 여자친구였던 비어트리스 우드를 통해 잡지 <맹인>에 신랄한 성명서를 쓰도록 하면서 맞섰다. 기존의 관점에선 예술답지 않은 예술이 분명하다. 대중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술이 심미적인 역할 말고도 다른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은 물리학에서 뉴턴이 이룬 성과를 생물학에서 달성했다. 그의 진화론은 당시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에 이어 영혼의 존재를 모른 척했으며, 창조주가 모든 생물을 동시에 만들었다는 성서의 권위를 일거에 뒤집었기 때문이다. 파괴력에 있어서 미술계의 <샘>과 비슷하다. 하지만 과학을 과학으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그래서 다윈은 정면 대결을 피했다. <종의 기원(1859)>에서 유인원과 인간을 연결하는 어휘를 철저히 배제했다. 책 발간 12년이 지나 <인간의 유래(1871)>에서야 자연선택이 인간에게도 적용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암시를 눈치채기엔 어렵지 않았다. 

<종의 기원> 출간 6개월 후인 1860년 6월 30일, 옥스퍼드대학 강당에서 세기적인 논쟁이 불붙었다. 영국 국교의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와 동물학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 사이의 격론이다. 헉슬리는 <자연에서의 인간의 위치(1863)>를 발표 후 ‘다윈의 불도그’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윈은 몸이 아파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윌버포스 주교가 장황한 논리를 펼친 다음, “누가 동물원의 유인원이 자기 조상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쾌하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리고 헉슬리를 쳐다보면서 “만약 당신이 원숭이 후손이라면, 할아버지 쪽이요, 아니면 할머니 쪽이요?”라고 물었다. 인간의 우월성을 믿는 편견에 기댄 질문이었다. 700명이 넘는 청중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면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헉슬리가 멋지게 되받아쳤다.


“나는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해도 전혀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양과 웅변의 재능을 편견과 오류를 조장하기 위해 악용한 사람의 후손이라면, 매우 수치스러워할 것입니다." (핼 헬먼,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계통수 <생명의 나무>

다윈의 진화는 선처럼 일렬로 진행되지 않는다. 방사형이다. (계통수 참조) 따라서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할 수 없고, 인류가 진화의 끝도 아니다. 이런 면에서 헉슬리는 “아름다운 가설이 추한 사실에 밀려나는 것은 과학의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시절을 만난 언론은 앞뒤 맥락을 생략한 채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뽑았다. 그리고 이 말을 다윈이 한양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제목 그림; 1871년 당시 찰스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서 풍자한 영국의 신문 만평)

사실 진화론은 그가 처음 한 주장이 아니다. 가까운 시기에 라마르크의 획득 형질설과 로버트 체임버스의 <창조의 자연사 흔적(1844)>도 있었다. 그리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독자적으로 다윈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여 <종의 기원> 출간을 서두르게 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의 관찰과 통찰력을 통한 실증적 증거 제시, 한계성을 인정하는 겸손함, 그리고 쉽게 쓰인 다윈의 글이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1831년 스물두 살 때 영국 해군 측량선인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로 출발할 때만 해도 다윈은 창조론자였다. 케임브리지에서 신학 학위를 받아 목회 활동을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5년간 남아메리카와 갈라파고스제도를 비롯한 남태평양 섬들을 탐험했다. 그곳에서 부리의 크기가 다른 핀치(finch, 참새목 되새과) 13종을 관찰했다. 

함께 승선했던 세 명이 그를 도왔는데, 그중 한 명이 다윈보다 한 살 많은 피츠로이 선장이다. 훗날 다윈의 변절(?)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윌버포스-헉슬리 토론장에서 “성서, 성서”라고 외쳤던 장본인이다. 학문적으로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조류학자 존 굴드(John Gould, 1804~1881)였다. 그는 휘파람새를 ‘휘파람핀치’로, 다른 종 찌르레기 사촌으로 알고 있던 것을 ‘선인장핀치’로 바로잡아 주었다. 서로 다른 모습과 재능을 지녔지만, 같은 종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만든 중요한 지적이었다. 이렇게 분류, 정리된 지식을 전체적으로 보고 나서야 다윈은 비로소 진화론자가 되었다.

 

다윈은 귀국 후 표본 상자를 정리하고 새로운 이론의 기초를 세웠으나 망설이던 끝에 23년이 지나서야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년도 채 되지 않아 진화론은 사회과학의 분석 도구로 활용되었다. 진화가 특정한 방향성을 갖는 ‘진보’의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경제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자기 논제에 과학적 증거로써 다윈의 가설을 차용했다. ‘적자생존’이라는 전투적인 말도 그가 만들었다. 정치적 편견이 한몫 거들자 인간 사회의 경쟁과 공격성을 부추기고,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데 이용되었다. 나아가 우생학적 결론을 도출하면서 유럽의 식민 지배와 인종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나치의 선전도구로 활용되는 극단적인 태도 모두 다윈의 논거와 정면으로 배치한다. 그의 진화는 의도나 목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종이 살아남는 자연 선택이다. 다윈은 이후 제5판에서야 ‘(환경에) 최적자의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용어를 채택했다. 다행히 살아 있을 때 다른 업적이 인정받아 그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뉴턴 옆자리에 묻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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