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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10. 2023

지난함: 예술에서는 창조로, 과학에서는 사실로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1817~19)>

1816년 7월 2일 아프리카 세네갈의 생루이를 향하던 메두사호가 암초에 걸려 침몰했다. 무능한 드 쇼미레 함장으로 인해 선별된 887명은 구명정에, 나머지 157명은 뗏목에 남겨졌다. 결국, 뗏목을 탄 사람들은 13일간 사투 끝에 15명만 구조되었다. 그러나 그중 5명이 다음 날 죽었고, <선상 일기>를 쓴 의사 앙리 사비를 비롯해 두 명이 오히려 식인 혐의로 고발되어 재판받았다.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가 분노했다. 1년 넘게 가로 7m, 세로 5m 대형 작품을 준비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의 모습과 사형수의 잘린 몸을 스케치했다. 이렇게 해서 낭만주의 대표작 <메두사호의 뗏목>이 탄생했다. 33세로 요절한 그의 살롱전 마지막 출품작이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더불어 루브르박물관을 대표한다. (제목 그림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 습작(1819)>이다)


한편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발자크 상(1898)>은 무려 7년이 걸려 완성했다. 발자크의 작품과 편지를 낱낱이 살폈고, 생전 초상화를 수집했다. 투르에 있는 발자크 기념관을 방문했으며, 그 지방 사람의 신체적 특징, 골격, 체형을 조사했다. 그리고 단골 양복점을 찾아가 그의 정확한 몸 치수까지 파악했다. 그러나 공을 들인 두 작품 모두 곧바로 공개하지 못했다. 전자는 작품의 이미지를 두려워한 어떤 이로 인해, 후자는 원하지 않는 모습이라며 문학가협회가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창조의 과정은 대중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난하다.



6,600만 년 전에 지구상의 다섯 번째 대량 멸종을 검증하는 과정 역시 멀고 험난했다.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져 공룡을 비롯해 생물 종의 약 약 3/4과 전체 속(屬)의 절반이 사라졌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일이다.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대량 멸종은 모두 다섯 번 뿐이냐?’라는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아니다. 5억 4,000만 년 전 캄브리아기로 들어서기 전에는 생물들의 몸에 단단한 골격이 없었다. 그래서 화석을 남겨놓지 않았다.

여하튼 마지막 멸종은 백악기와 팔레오기 경계에서 발생했다. K-T 멸종이라고 하며, 공식 명칭은 ‘K-Pg’ 멸종이다. 이전의 절멸과 달리 지구 내부가 아니라, 외계의 유성체의 충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하지만 '과학적 사실’로 인정받기까지 많은 과학자(지질학자, 화학자, 물리학자)의 수고가 대단했다.

소행성은 화성과 목성 사이에 띠를 이루며 공전하는 암석 덩어리다. 하지만 ‘외계의 물체가 지구를 때렸다’는 개념이 매우 낯설었을 때였다. 1794년 7월 이탈리아 시에나, 그것도 과학 아카데미에 돌이 떨어졌다. 거리와 방향이 달랐음에도 18시간 전에 때마침 분출한 베수비오 화산의 것으로 생각했다. 19세기 들어 화학적 측정 기법이 발달하고 나서야 겨우 지구로 떨어지는 유성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유성체로 인해 멸종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여전히 급진적이었다. 1988년까지도 미국 화석학자 절반 이상이 공룡의 멸종은 유성체의 충돌과 무관하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퇴적층에서 거대한 유성체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1970년대에 지질학자 월터 앨버레즈(Walter Alvarez, 1940~)가 ‘스칼리아 로사’라는 심해 석회암에 주목했다. 공룡이 살던 마지막 시대, 백악기 말 해양 퇴적물이다. 두께가 400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암석은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다른 층과는 달리 0.6cm에 불과한 얇은 점토층에서는 화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중생대 백악기 지층 K층과 신생대 3기 지층 T층 사이, 즉 K-T 경계층이었다. 윌터는 K-T 지층이 형성된 이 시기에 “왜 아무런 생명체의 흔적이 없는지”가 궁금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아버지 루이스 앨버레즈(Luis Alvarez, 1911~1988)와 함께 다른 K-T 층의 이리듐(Ir) 함량을 조사했다. 함량은 이상하리만치 예측치를 크게 웃돌았다. 더욱 정밀한 화학적 조성을 측정코자 로렌스 연구소의 프랭크 아사로(Francesco Asaro, 1927~2014)와 헬렌 미셸이 합세했다. K-T 층에서 30배, 90배, 심지어 덴마크에서는 160배 농도가 짙은 이리듐을 잇달아 발견했다. 이 정도의 이리듐이면, 지상에서 300만 년 이상 누적 기간이 필요하다. 통상 60년 정도 소요되는 얇은 층임을 감안할 때 너무 긴 시간이었다. 결론은 하나, 정상적인 퇴적이 아니라 우주에서 유성체를 타고 왔다는 방증이었다. 물론 초신성이 이리듐의 공급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플루토늄 244가 함께 존재해야 했다. 

1980년, 앨터는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6,600만 년 전 외계로부터 유성체가 지구와 부딪쳐서 이리듐을 비롯한 희귀 금속을 쏟아부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유성체의 크기는 지름이 무려 10~15km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지질학자들은 비웃었다. 그리고 인도의 데칸 트랩을 반대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인도 지질학자들이 퇴적물에서 공룡 뼈와 알의 조각을 발견함으로써 자동 폐기되었다. 

NASA의 칙술루브 충돌구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이젠 외계가 개입한 생생한 증거의 현장, 크레이터(crater, 충돌구, 구덩이)를 찾아야만 했다. 폭은 맨해튼 너비의 3배쯤 되고, 최소 초속 20km가 되는 충돌체가 남긴 사건 현장이다. 이때 발생한 에너지는 TNT 100조 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10억 배 규모와 맞먹는다. 1982년 많은 과학자가 세계 40여 곳의 장소를 면밀하게 조사했다. 그러나 엄청난 크기에도 불구하고 크레이터가 실제 발견되기까지는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때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1950년대부터 멕시코 국영회사 페멕스에 종사하는 지질학자들은 지름 180km, 깊이 50km의 거대한 구덩이가 유카탄반도와 멕시코만을 연하여 묻혀 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회사 지질학자들은 그것이 화산의 증거라고 해석했다. 1981년에 회사 직원 펜필드가 학회에서 충돌 사건의 증거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청중 대부분은 공룡 멸종에 대한 가설 자체를 몰랐기에 두 사건을 연관 지을 생각조차 못 했다. 1990년이 되어서야 크레이터를 유성체 충돌과 관련하여 조사했다. 아버지 루이스 앨버레즈가 타계한 이후였다. 이듬해 알란 힐데브란트에 의해 충돌구라는 사실을 공식화했다. 앨터의 가설이 사실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충돌구는 근처 항구의 이름을 따서 ‘칙술루브 푸에르토’라 불렀다. ‘악마의 꼬리’라고도 번역되는데,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 지점에서 우린 이런 질문과 마주칠 수 있다. “그래서? 6,600만 년 전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는가?” 과학자들이 보여준 ‘사실’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결국 대중의 신뢰를 끌어낸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지금 하는 말, 특히 인류 멸종과 관련 대중이 경청하게 만든다.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는 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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