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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24. 2023

보스의 상상과 초기 우주 38만 년까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속적 쾌락의 동산(1504?)>

상상력은 인지의 한계를 확장하는 힘이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다른 화가들이 성경 속 등장인물이나 사건의 묘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천국-지상-지옥을 가장 미스터리하게 표현한 화가가 있었다. 플랑드르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세속적 쾌락의 동산(1504?)>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네덜란드 스헤르토헨보스에서 태어난 그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1480년부터 화가로 활동했으며, 이듬해 나이가 많고 부유하며 지체 높은 여성 고이아르츠 반 덴 메르베네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어쨌든, 풍족해서였을까? 천문학과 점성술, 그리고 여행서적에 깊이 심취했으며, 이런 그의 경험을 함께 버무려 상상의 나래를 활짝 폈다.  

판화로 복제되어 널리 퍼진 그의 그림은 요즘도 패러디될 정도로 독특하고 현대적이다. 특히 <월리를 찾아라> 형태의 화풍은 피터르 브뤼헐에게 큰 영향을 줬다. 좌에서 우, 세 폭에 천국과 지상 그리고 지옥을 각각 표현했다. 왼쪽 패널은 창세기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한다. 가운데 패널이 인간세계, 즉 ‘쾌락의 동산’이다. 육체적인 쾌락이기에 타락을 의미한다. 따라서 맨 오른쪽에 묘사한 암흑의 지옥세계로 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쾌락을 모두 죄로 매도한다는 불만이 있지만, 어쨌든 기독교적 기발한 발상이 무척 복잡하다. 20세기에 들어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 천착했던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적 회화를 비롯하여 페터 뎀프의 추리 소설 <보스의 비밀(1999)>, 그리고 영화 <스타워즈(2017)>에 나오는 외계인의 모티브가 되었다. 



과학에서 상상은 관찰과 실험으로 완성된다. 우주배경복사 탐사선 COBE(Cosmic Background Explorer)가 임무를 마친 후 미 항공우주국은 2001년 6월 30일, ‘윌킨슨 극초단파 비등방탐사선(WMAP, 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을 발사했다. 프로젝트의 원래 이름은 그냥 MAP이었다. W가 덧붙여진 것은 우주 탐사선 계획에 공헌이 컸던 데이비드 윌킨슨(David Wilkinson, 1935~2002)을 기리기 위함이다. 그는 우주배경복사 해설 논문을 쓴 프린스턴 대학교 로버트 미키의 연구진 일원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노벨상을 받지 못한 그의 아쉬움을 덜어냈을지는 의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탐사선 이름에 붙은 ‘비등방(非等方)’이다. 우주배경복사에서 일정하지 않은 무엇을 정밀하게 측정하려는 의도를 암시한다. ‘최초의 빛’ 우주배경복사는 우주 전반에 퍼져 있음에도 정보(온도)가 동일했다. 이것은 동시성과 등방성을 의미하며, 동시성은 ‘인플레이션(inflation)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빅뱅 이론의 발전된 형태로, 초기우주에 대형 폭발과 함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른 급팽창 시기가 있었기에 우주의 먼 끝까지 정보가 같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지점에서 근원적인 의문이 생긴다. 등방성을 보인다면, 우주가 균질하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떻게 물질이 모여 별과 은하를 형성했느냐?”는 합리적인 의심이 뒤따른다. 따라서 비등방성의 흔적을 밝혀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우주가 극도로 조밀하고 뜨거운 특이점에서 출현했다는 대폭발 이론(위키백과)

르메르트는 원시 우주를 '우주 달걀'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크기에서 오해를 불러오기 쉽다. 빌 브라이슨의 말을 빌려 가늠해 보자. 양성자는 비현실적으로 작은 원자의 일부분이다. 알파벳 ‘i’에 찍힌 점에 5,000억 개가 들어갈 수 있다. 그 양성자를 다시 10억 분의 1 정도 부피로 줄인다고 상상하라. 그리고 어떻게 하든 대략 30g 정도의 물질을 그것에 채워 넣어라. 여기엔 어떤 물리적 법칙도 통하지 않는 상태이기에 '특이점'이라 부른다. 특이점은 일반상대성 이론에 바탕한 가설이다. 

1970년대 스티븐 호킹은 점과 같은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며, 곡면 형태의 ‘무경계 가설’이란 아이디어를 냈다. 여하튼 이렇게 작은 우주엔 시간과 공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빅뱅으로 인해 시공간이 시작되었다. 또한 우주에는 중심점이 없다. 따라서 빅뱅이란 마치 풍선 표면에 여러 개의 점을 찍어 놓고 부풀렸을 때 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형태의 급격한 팽창을 말한다. (왼편 그림 참조)

 

초기 우주를 이해하려면, 대폭발 이후 몇 가지 시간 개념이 중요하다. 먼저 ‘플랑크 시간’이다.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측정이 비로소 가능해진 최소한의 시간 단위이다. 플랑크 길이(1.62 ×10^35m)를 빛이 지나가는 시간, 10^-43초를 말한다. 

두 번째는 대폭발 후 1초다. 물리 법칙이 성립하는 최초의 시간으로 매우 유의미한 변곡점이다. 우주의 크기가 태양계의 천 배 정도, 온도는 내려가 약 100억 K이 된 시점이다. 네 가지 힘, 즉 중력과 전자기력, 그리고 원자핵에 작용하는 강력과 약력이 독립적으로 태어났다(대통일 시간). 그리고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작은 입자인 쿼크가 세 개씩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가 만들어졌다. 

세 째 시간, 3분이 되자 이들이 모여 오늘날 우주의 구성 물질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소(74%)와 헬륨(24%)의 원자핵을 이루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전에는 모든 힘이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존재했으며, 우주의 기본 속성도 이미 조밀하게 다 품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후 우주는 여러 단계를 거치지만, 전자와 원자핵이 분리되어 각각 따로 운동하는 '플라스마' 상태 그대로였다. 

마지막으로 빅뱅 이후 38만 년이 중요하다. 전자와 원자핵이 결합하여 드디어 원자가 탄생했다. 가장 단순한 원자인 수소, 헬륨, 중수소의 등장하면서 '물질 시대'의 도래를 알린다. ‘최초의 빛’ 우주배경복사도 이때 비로소 우주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우주배경복사 비등방성 감도 비교(펜지아스-COBE-WMAP)

탐사선 COBE가 우주에서 마이크로파 검출기를 통해 오염되지 않은 우주배경복사를 7,000만 번이나 측정했다. 1992년에 온도를 색으로 나타낸 지도를 보내왔는데, 10만 분의 1의 차이를 보이는 비등방성으로 인해 얼룩이 나타났다. 신생 우주에 밀도 차이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무시해도 좋을 이러 미세한 일탈로 인해 중력적 불안정성을 키웠다. 

이윽고 WMAP가 7년 동안 COBE보다 40배 정밀하게 관측한 결과, 우주의 나이(137.72±1.12억 년)와 우주 공간의 편평성(약 2%)에서도 오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모두 양자 요동(‘원시 밀도 요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편차다. 그리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대폭발 후 3억 년이 되자 밀도가 조밀한 곳에서 최초의 별이 탄생했고, 이어 은하를 형성했다. 피자 반죽이 균일하지 않고 군데군데 작은 덩어리와 주름이 생기는 것처럼.

WMAP가 알려준 또 하나의 놀랄 만한 결과는 우리 우주가 온통 암흑천지라는 사실이다. 우주에는 우리가 아는 물질이 4%밖에 없고 나머지는 암흑 물질이 22%, 암흑 에너지가 74%를 차지한다. 따라서 여기서 암흑이란 어두워서이기도 하지만, 정체를 몰라서이기도 하다. 그중 암흑 에너지는 기묘하게도 음의 척력을 가지고 있어 우주의 매우 빠른 팽창을 돕는다. 그러나 WMAP도 보스가 상상한 천국과 지옥 비슷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없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우주 깊은 곳에서 꽈리를 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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