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웹디자이너의 고뇌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566개의 특허를 보자 처음에는 '엥? 설마 우리 거랑 다른 제품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대표는 절대로! 저 어어어 얼대로! 우리 제품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표는 지속적으로 본인의 개발 스토리와 포기하지 않았던 끈기, 혹은 이 제품 외길인생 20년 등을 내게 주입시켰다. 그래서 나는 대표가 다소 사회성이 떨어지고, 모지리 같지만, 한 분야에선 천재인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다. 어쨌건 세상을 놀라게 한 발명품들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니까. 부장님, 나, 팀장님 셋은 그렇게 믿었다.
"대표님은 대화가 잘 안되지만 어쨌건 천재인가 봐 그러니까 저런 걸 만들었지"
우리 셋은 저런 대화도 자주 했었다. 아무튼 그런 천재가 만든 제품이 특허 조회에서 이렇게 쉽게 우수수 쏟아져 나오다니? '특허'의 '특'자도 모르는 초보인 내가 검색해도 이 정도인데 법적으로 문제 될만한 것들을 더 추가시켜 검색하면 더 많이 나온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데 특허를 검색하던 중 대표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회의실을 빠져나왔고 대표의 쿵쾅 거리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회의실은 적막이 흐르다가 부사장의 사과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김 대표가 원래 좀 저래요."
"괜찮아요. 자주 겪습니다."
변호사는 차분히 부사장님께 회사와 제품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부사장은 아는 한에서 천천히 알려주었고 나는 이 대화를 엿듣던 중 놀라운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1. 대기업이 포기한 제품
대표는 자주 이 제품을 같이 개발하다 포기한 XX화학 이야기를 했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그곳에서 이 제품을 개발하다가 포기했다니! 우리 대표 천재 아니야?
아니었다. 부사장이 말한 진실은 이랬다. 우선 XX화학은 장비 개발 회사가 아니고 화학 즉, 우리 제품의 소모품으로 들어가는 ‘분말’을 함께 개발하다가 이윤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 중도하차한 것이었다. 결국 그 ‘분말’은 대표도 개발 실패해 일본 회사에서 사 오고 있었다.
결론은 대표의 ‘제품 공동 개발 중 대기업 포기!’는 우리 제품이 아니었다. 소모품이었던 그 분말은 결국 대표도 개발하지 못해 일본 회사에 외주를 준 상황이었다. 그리고 우리 제품(장비)과 비슷한 제품들은 대기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특허를 출원해놓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려운 기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대기업이 이걸 안 팔지?
변호사님은 이렇게 정리해주었다.
“계산해보니 시장성이 없다고 생각한 거 같은데요?”
2. 대기업 회장의 찬조금
부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쯤 받았다는데 그걸 왜 준지는 모르겠어. 얼마를 줬는지도 모르겠고,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모르겠고, 술자리에서 줬다는데 뭘까? 우리 제품 본 적도 없대”
그러게 정말 뭘까?
3. 세상에 없던 제품
이미 국내 업체가 한번 생산했다가 미국에 수출을 앞두고 세계 각국의 회사들에게 소송당하고 -28억 상태로 파산했다는 사실!
또한 우리 제품과 기술은 물론 디자인도 상당히 유사한 상품도 이미 특허 등록되어있었다. 물론 '유사한 특허가 있을 수도 있는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든 의문은 다른 것 이었다. 대표의 말대로라면 이 제품은 세상에 내놓기만해도 대박인 제품이며 경쟁이 불가한 제품인데, 왜 사람들이 팔지 않는거지? 왜? 어째서 이렇게 개발해놓고, 특허도 내놓고 시장에 내놓질 않는 걸까?
아무튼 이것 외에도 대표의 개발 스토리 및 구구절절한 인생 이야기가 많았는데 거의 대부분이 거짓이었다.
사실 이 회의실 사건을 통해 알게 된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것이었다. 바로 부사장 역시 대표를 믿지 못하고 무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회사의 회의실에서, 그것도 비즈니스를 함께할 거래처 혹은 변호사에게 아무렇지 않게 대표를 욕하고, 제품의 기술을 무시하는 발언을 전혀 개의치 않아한다는 사실은 늘 충격이었다. 직원들이 모두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느 날, 대표가 국가지원사업에 도전해보겠다고 끙끙되는 것을 보았다. 어찌어찌 며칠을 그러더니 마감 당일 서류 준비를 끝냈다. 그런데 의외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감을 한시간 정도 남겨놓고 또 부사장과 대표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와 부사장은 항상 노트북을 가져다 놓고 회의실에서 업무를 보았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폰을 빼고 왜 또 둘이 싸우는지 들어보니
“그러니까 공인인증서가 어디 있냐고!”
“아니 이게 비번이라니까?”
“그러니까 비번을 치려면 공인인증서가 있어야지”
이런 식의 의미없는 말장난 같은 대화가 오갔다. 처음에는 ‘대표가 공인인증서가 어디 있는지 모르나?’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공인인증서의 위치를 묻는 부사장의 말에 대표가 자꾸 동문서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대화를 듣던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설마! 대표.. 공인인증서가 뭔지 모르나?’
설마, 에이 설마! 하며 마침 보고드릴 내용이 있어 회의실로 향한 나는 대표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 설마가 사실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대표는 나를 보자마자 카톡창을 들이밀며 “김대리! 이것 봐바” 했다.
“이게 뭔가요?”
“우리 딸이 이런거 잘알아! 이거 좀 봐줘봐”
대표의 휴대폰을 넘겨 받은 나는 의문의 파일들이 카톡창에 잔뜩 업로드 되어있는 걸 보았고 스크롤을 내리며 그 파일들이 모두 공인인증서의 ‘NPKI’ 폴더 안에 들어있는 개별 파일들임을 알았다. 세상에..
‘이게 아빠 공인인증서야. 비번은 XXXXX’
‘근데 안열려’
‘다운 받았어? 컴퓨터로 해야해’
‘어떻게 다운받아?’
이 댕청한 부녀를 좀 보아라! 카톡창으로 공인인증서를! 그것도 개별 파일 하나하나를 보내며 저장하라는 딸과 우리 딸이 이런 것을 잘안다며 뿌듯해하는 대표! 환상이었다.
웃음과 어이없음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나는 우선 대표에게 따님한테 전화 좀 걸어달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직원인데요. 그 나눠보내신 파일이요. 나누지 마시고 NPKI 폴더 자체를 압축해서 보내주세요.”
“그런데 그거 파일이 많아서 보내려고 하면 안보내져요”
“아아 그거 그러니까 압축하시고 보내시면 되요.”
“근데 파일이 많아서 안돼요.”
설마 압축을 모르나? 했는데 역시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대표는 옆에서 ‘우리 딸 똑똑하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의 딸은 압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법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냥 전화를 끊었다.
“대표님 공인인증서가 사실 이렇게 보내면 손상이 생길 수도 있어요. 메일로도 그래서 못 보내거든요. 대표님 혹시 공인인증서 어느 은행 꺼 쓰셨어요?”
“모르겠는데..그거 은행에서 해?”
“어..음..그럼 주거래 은행 어디세요?”
“농협”
“잘됐다. 그럼 여기 1층 농협가셔서 보안카드 재발급 받아오세요! 제가 공인인증서 여기로 저장해드릴게요. 그게 가장 빠를거 같아요.”
“에이 시X 뭐가 이렇게 복잡해!”
직원 앞에서 찰진 욕도 잘 내뱉는 사람. 무능력, 허언증에 성차별, 성희롱은 기본 장착이고, 공인인증서도 모르는 이런 사람이 이 회사의 대표였다.
이쯤되면 도대체 대표가 몇살이길래 저래? 한 60~70대쯤 되는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대표는 49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