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nama]
우리 집은 가난했다.
밥을 굶는다던가 학교도 못 다닐 정도의 찢어지는 가난은 아니었지만, 학비 지원을 받으며 친구들이 알까 봐 불안한 사춘기를 보내야 할 만큼,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턱없이 부족한 용돈으로 뱁새를 따라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나날들을 보내야 했을 만큼, 교복 사달란 말을 차마 못 하고 선배들에게 맞지도 않는 교복을 얻어 입어야 했을 만큼, 언감생심 학원은 꿈도 못 꾸고 불법으로 인터넷 강의를 다운로드 받아 공부하면서 학원을 못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원치 않아서 가지 않는 거라며 자유분방한 고딩 코스프레를 해야 했을 만큼, 우리 집은 그만큼 가난했다.
예전에 열심히 보던 웹툰에서 가난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돈이 없는 일 따위는 불행이 아니라 불편일 따름이다.
김치 하나에 먹는 맨밥이 맛이 없어서나, 브랜드가 없는 옷을 입는 일 따위가 힘든 게 아니다.
겨우 그런 게 아니다.
가난이 사람을 좀 먹어가는 까닭은 고개를 낮아지게 하고 목소리를 작아지게 하니까.
포기에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선택이 좁아지도록 만드니까.
가난은 날카롭지 않다. 둔하고 뭉툭한 형태를 하여, 가난이란 놈은 자존감을 조금씩 짓이겨 누른다.
- 웹툰 [멀리서 보면 푸른 봄] 中 -
월세와 생활비를 벌며 장학금을 받아보겠다고 쉴 틈 없이 달리던 그 어느 시절, 나는 저 글을 보고 그렇게도 울었다. 가난이 서러워서, 현실이 너무 고된데 미래라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아서, 애써 외면해오던 막막한 현실을 직격타로 얻어맞은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서럽게도 울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가난은 꽤나 잘 버티는 타입이었다.
가끔씩은 가난에 무너져내려 처량 맞게 울어대기도 했지만 왜 나는 학비지원을 받아야 하고, 교복을 얻어 입어야 하냐고 악을 쓴 적도 없고, 가난에 대한 설움으로 엇나간 적도 없었다.
그냥저냥, 그런대로 나는 가난은 잘 버티며 살아왔다.
어쩌면 날 때부터 사는 내내 가난해 왔어서 꽤나 맷집이 단단히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가난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서 새삼 그리워할 좋았던 시절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난은 내 몫이 아니라 부모의 몫이라고, 우리 집이 가난한 건 내 탓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선을 그을 만큼 영악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평생을 가난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어도 까치발을 서고 나는 곧잘 굳게 버텼다.
어린 시절 가난은 독립심을 키우고 경제관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만큼 베알 꼴리는 말에도 그럭저럭 마지못한 끄덕거림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가난은 참을만했다.
딱히 부잣집 친구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건 내 오기이며 자존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오기도 자존심도 영악함도, 힘을 잃게 만드는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애정이었다.
돈 많은 친구는 딱히 부럽지 않았는데, 넘치게 사랑을 받고 자란 티가 나는 친구를 보면 내 일그러진 내면은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 만큼은 정말로, 진심으로 부러웠다.
돈 많은 고모의 딸인 사촌동생이 비싸고 좋은 옷을 입는 것도, 초등학교부터 교복을 입는 엘리트 학교에 다니는 것도 부럽지 않았지만 제 딸이 최우선인 부모를 가졌다는 것만큼은 부러웠다.
아빠는 애당초 제자신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 내게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고, 엄마는 남의 자식 먼저 챙겨줘야 한다는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빠 이야기를 하자면 2박 3일도 더 걸릴 테니 차치하고, 엄마는 배려하느라 사촌동생을 먼저 챙기면서도 늘 마음 한편에 나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그렇게 상처 받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배려고 뭐고 나도 내 딸부터 챙겼어야 하는 건데- 하며 후회와 한탄을 해왔다는 걸 나중에는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고모도 고모부도 엄마도 아빠도 다 사촌동생이 먼저였던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하나 있는 동생이랍시고 동생은 미워하지도 못하고 그냥 내가 사랑받지 못할 만큼 못난 사람인가 보다 하며 조용히 서러워했다.
가장 내 편이어야 할 사람이 내 편이 아니라는 건 꽤 서글픈 일이다.
그 억울함과 서러움이 중2병과 기막힌 콜라보를 만들어냈던 중학교 시절에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어.’라는 사춘기 모드에 돌입해 세상에 날을 세웠더랬다.
시니컬함으로 중무장을 하고서는 매사에 삐딱선을 타고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내 알바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디서도 잘 섞이지 못하고 겉돌면서 센척하기에만 바빴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그런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나는 영악했고 그런 성격으로 버팅겨 봤자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래서 웃었다. 밝게 웃고 장난을 치고 재밌는 얘기를 하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어릴 적 가난하지 않은 척 하던 연기력을 발휘해 이번에는 평범한 가정에서 적당히 사랑을 받고 자란, 큰 그늘 없는 해맑은 사람을 연기했다.
하다 보니 없는 돈을 있는 척하기보다는 받지 못한 사랑을 받은 척 연기하는 게 오히려 쉬웠다.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타인의 얕은 호감도 일종의 애정은 애정이라고, 나름대로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며 조금씩 나아지기도 했고, 연애를 하게 되면서 넘치는 사랑을 받아보기도 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애당초 내게 주어지지 않은 사랑에 목매느니 내게 호감을 가져주는 이들과 나를 사랑해주는 연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가끔은 정말 사랑 많이 받고 자라 꼬인 데 없이 맑은 사람을 마주할 때, 힘든 일이 있으면 가족과 상의하고 위기의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아버지를 가진 드라마 속 인물을 볼 때, 한 달에 한두 번은 금요일에 짐을 싸들고 와서는 주말에 본가에 간다고 해맑게 웃는 직장 동료를 볼 때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쓸쓸해지곤 한다.
어쩌다 내게 '그러고 보니 본가에 가는 걸 거의 못 봤네요'라고 물을 때면 ‘아- 그랬나요? 전 불효자식인가 봐요.’ 라며 장난스럽게 웃어넘긴다. 그러고 나면 조금 더 쓸쓸해진다.
우습게도 지금의 나는 꽤나 연기력이 괜찮은지 종종 ‘넌 참 사랑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나.’ 라던가 ‘혹시 O형이에요? 엄청 붙임성도 좋고 성격이 밝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내 아킬레스건을 극복해냈다는 대견함에 뿌듯하면서도 한 켠으로는 마음이 써서, 아직 멀었구나- 하는 복잡한 마음이 든다.
대단히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서른이라는 나이를 먹고도 나는 주어지지 않은 애정에 기가 죽는다.
가끔은 나도 가야 해서 가는 집이 아닌 가고 싶어서 가는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나는, 가끔은 비빌 언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언덕에서 호탕하게 웃을 수 없다면 목놓아 엉엉 울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