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쌤소나이트 백팩을 좋아한다. 가성비 좋은 쌤소나이트 백팩은 그에게 필수품이어서 어딜 가나 들고 다닌다. 그가 백팩을 고르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등 쪽에는 반드시 노트북 수납이 가능한 주머니가 있어야 된다. 노트북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노트북이 꼿꼿이 서있을 수 있도록 노트북용 주머니는 폭신하고도 튼튼해야 한다. 백팩 주머니 개수는 다다익선이라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가 주로 백팩 주머니에 담고 다니는 물건들은 다음과 같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그의 손 끝에 매달려 있던 담배와 라이터는 물론이거니와 야근과 밤샘이 잦아서 즐겨 찾던 하얀 졸음껌 통이 들어가야 하고, 명함지갑과 0.7mm 검정색 제트스트림 펜(또는 거래처에서 받은 펜)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마음을 다스릴 때 손이 가는 약통을 보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그 가방은 합격이다. 비즈니스 백팩의 색상은 어차피 남색 아니면 검정, 네이비 아니면 블랙이기에 선택의 폭이 좁다. 이번엔 다른 브랜드 가방을 사볼까 해서 가격대가 비슷한 브랜드 매장을 둘러봐도 결국 그의 선택은 제자리로 돌아와 쌤소나이트였다.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이리 높다니, 참 충직하기도 하지.
그의 뒷모습은 늘 백팩이 붙어있다. 아마도 그가 내게 곁을 내어준 시간보다 백팩과 일(심) 동체 되어 지나온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첫 직장을 다니면서 글자 그대로 눈코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던 그에게 노트북은 휴대폰만큼 중요한 물건이어서 노트북을 소중히 여겼기에 거북이처럼 백팩을 등에 이고 지고 다녔다. 겉모습이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탓에 나이를 세어보면 영락없는 아저씨인데 그를 처음 본 사람은 배낭 멘 모습을 보고 그가 학생인 줄 착각하거나 그의 나이보다 훨씬 젋게 보았다. 오죽하면 식당에서도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 테이블을 셋팅해 주던 직원분들이 그가 내 또래라고 짐작했을까. 중년 여성들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그의 피부가 뽀얀 게 왕자님 같다고 해서 나조차도 시샘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어찌 됐든 간에 그가 몸 바쳐 일한 직장에서 빠져나와 나에게서 떨어져 새 삶을 일구기로 결심했을 때, 팀원들이 선물한 백팩 브랜드 또한 쌤소나이트였다.
그가 하도 가방을 여닫아서 지퍼는 금세 고장이 난다. 그는 지퍼 수선을 어디에 맡기기보다는 새 가방을 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는지 "그냥 새로 사지 뭐."로 퉁쳤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국내, 해외 가리지 않고 출장 다니면서 시간을 같이 나눈 가방을 툭 버리기엔 내 것도 아니면서 괜히 아까웠다. 어차피 본인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곧 죽어도 절대 움직이지 않는 타입이라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라며 쌤소나이트 고객센터에 전화를 건다. 고객센터 상담원은 건조하지만 친절함은 최대치로 끌어올려 나의 문의사항에 대답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퍼가 고장 났으면 문제 생긴 가방을 들고 매장에 방문하세요." 백화점에서 산 쌤소나이트 가방도, 몇 개월 전 아웃렛에서 산 빈폴 가방도 지퍼가 고장나 가방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두 개 모두 서울 모처에 있는 브랜드 매장에 가져가서 수선을 맡기면 될 일이었다. 너무 간단했다. 하지만 신입사원 때 쓰던 낡은 백팩이 집에 있었던 게 문제였다. 그에게 고장난 가방 대신 이 가방을 메는 거 어떻겠냐며 제안한 내가 문제였다. 지퍼가 고장난 가방을 메고 다니기 싫다며 아침부터 입이 댓 발 나오더니 내 손에 든 오래된 가방을 보고는 옳다구나 하면서 화색이 돈다. 색이 바랜 가방을 어깨에 메며 지퍼가 고장난 가방의 존재는 잊었는지 눈길도 주지 않는다. 지퍼만 고장났을 뿐인데 지퍼가 제 역할을 못해서 며칠 전까지 그의 등을 지키던 가방은 바로 팽당한다.
그가 떠나간 이후로 그의 물건을 정리하며 가장 거슬리는 아이템이 지퍼가 고장난 가방이었다. 제 구실을 못하는 가방 두 개가 버젓이 방바닥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볼썽사납다. 한때는 고장난 가방을 가지고 동네 수선집과 세탁소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가게 사장님들에게 이 가방을 고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사장님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지퍼수선과 옷 수선에 쓰는 기계가 달라서 자신들이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백화점이나 아울렛이나 쇼핑몰에 있는 가방 매장에 방문하여 수선을 맡길까도 했다. 갈까 말까 할까 말까 고민하면, 주로 가거나 하는 사람이었는데 성가신 고민으로 인해 한없이 작아진다. 초라하게 토라져 버린 사연 많은 여자는 생각을 고쳐 먹는다. '니가 날 떠나간 마당에 내가 왜 니 걸 쓰냐?' 하면서 순식간에 억하심정을 품고 옹졸해져서 가방을 집 밖에 내놓기로 작정한다. 고장난 가방을 메던 사람이 나를 고장내다니, 어이가 없어서 황망하다가도 조금씩 화가 누그러진다.
우리집에 있는 종량제 쓰레기봉투는 20리터짜리 뿐이어서 가방 두 개가 들어갈 리 없다. 어차피 지퍼 빼곤 아무 문제없는 가방이라 쓰임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기로 결정한다. 누군가는 고쳐 쓰겠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던데, 가방은 고쳐 쓸 수 있지 아니한가. 게다가 빈폴 백팩은 산 지 얼마 안 돼서 눈을 반쯤 감고 보면 새 상품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그의 흔적이 묻어있는 가방을 내 공간에 두고 싶지 않아서 가방 두 개를 양쪽 어깨에 하나씩 메고 씩씩하게 엘리베이터로 직행한다. 기부함에 도착하기까지 5분도 채 안될 텐데 억겁의 세월이 가는 마냥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춘 줄 알았다. 지난여름, 그는 새 것 티가 나서 윤기가 촤르르 흐르는 가방을 메고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집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뻗어나가고 있었을까? 다시 나에게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겠지만 그의 위태로운 눈동자를 보아하건대 자기도 처음 겪는 감정이라 엘리베이터 속 공기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데 온몸이 덜컹대고 있었다. 2024년 겨울, 24절기 중 소설을 앞둔 지금 지퍼가 고장난 텅 빈 가방은 자신의 행방을 모른 채 내 어깨를 가만히 짓누르고 있다.
들리는 에세이: 가방
가수: 선우정아
노래: 시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