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왔다. 밤이 내려앉았다. 첫눈 온 새벽녘부터 지금까지 첫눈 소식 나눌 사람 하나 없다. 일터에서나 출근길에 눈발이 얼마나 날리는지, 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부는지, 눈 내린 산만 바라봐도 시야가 트여서 설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는 얘기가 오고 갔지, 정작 첫눈을 맞은 기분을 공유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그의 아이패드와 얽힌 글을 발행하기로 했는데 첫눈이 내려와 계획은 무산되었다. 글감은 '첫눈'과 '신발'로 바뀌었다.
이사 온 후로 처음 맞는 겨울밤에 첫눈이 내렸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그에게 이런 날에는 나가줘야 한다며 그를 채근했다. 이 동네에서 처음 보내는 겨울을 기념하기 위해, 첫눈 내린 날은 올해 단 하루뿐이 없으니까 밖으로 나가자고 말이다. 그는 별 걸 다 기념한다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자기도 첫눈을 만끽하고 싶었는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만다. 그가 가진 신발이란 운동화와 정장 구두 그리고 1년에 한 번 신는 등산화뿐이어서 방수와 방한을 위해 등산화를 신으라고 권유했지만 제 고집대로 고운 눈처럼 흰 운동화를 신는다. 열이 많아 좀처럼 감기에 걸리지 않는 그와 달리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단단히 무장한다. 귀마개를 쓰고, 장갑을 끼고, 방수가 되는 외투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는다. 집 밖에 나오니 겨울왕국이다. 안에서 볼 때보다 훨씬 많이 쌓인 눈을, 별사탕처럼 빛나는 눈을 밟으며 뽀득뽀득 소리를 낸다. 그도 나를 따라서 곧잘 뽀득거린다. 눈이 내리면 흡음효과가 있다던데 우리 동네 사람들의 걱정과 근심은 땅 밑으로 꺼졌는지 온 세상이 고요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하호호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보아하니 눈 내린 밤을 본격적으로 즐기는 아이들이다. 이쪽에는 눈싸움이 한창이고, 저쪽에는 눈사람을 만든다. 눈이 오기만을 기다린 아이들은 한껏 고양되어 빨강, 노랑, 파랑 썰매를 끌고 나오며 어떤 눈길에서 타면 더 재밌을지 고심한다. 우리는 첫눈을 즐기겠다고 맘먹었지만 나이를 꽤 먹어서 미끄러지면 골로 가기에 가파른 계단과 경사진 언덕길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간다. 길가엔 자동차도, 사람도 하나 없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이다. 휴대폰 셀카모드로 우리의 첫눈 맞은 날을 기념한다. 그리곤 각자 포즈를 취해서 독사진을 남긴다. 코가 새빨개진 채로 함박웃음 지으며 엄지척을 한 사진이 아직도 사진첩에 남아있다.
어젯밤 침대에 누워 아이폰을 붙잡고 오늘 놓친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트위터에는 또 어떤 잼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연신 스크롤을 내렸다 올렸다 새로고침한다. 그러나 생체시계에 맞춤형인 몸뚱이는 눈꺼풀에게 눈을 감으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나라도 더 보려고 오기를 부리다 눈꺼풀이 무거워 깜빡 잠이 들려고 해서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알람을 맞춘다. 혼자여서 이 공간에서 잠들면 깨워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휴대폰만이 유일한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한다. 알람 시간까지 확인하면 일기예보를 볼 차례다. 오늘 새벽 사이 첫눈이 온다는 소식까지 확인하고 이불에 몸을 맡겨 기대감에 바람 가득 넣은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잠이 든다. 어김없이 아침이 왔고 약속대로 첫눈이 왔다. 첫눈이 찾아왔는데 첫눈이 왔다고 창밖을 보라며 그를 깨워야 하는데 침대엔 엉킨 베개와 이불만이 제자리에서 온기를 품고 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올해 겨울을 알리는 첫눈이 휘날리는 걸 보고 있자니 눈발이 나를 통과해 물기를 스미며 괜찮다고 위로한다. 벌써 2024년 11월 하고도 27일이 지났다. 12월이 온다. 하루가 저물며 첫눈이 이렇게 지나갔듯이 올해의 마지막 한 달도 서서히 다가온다. 올해 처음 맞는 12월은 어떨지, 12월에도 계속 우리 관계를 고아서 진국이 우러나올지 알 수가 없다. 허나 확실한 건 어제를 지나 오늘을 살면 내일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 그거면 됐다.
들리는 에세이
가수: Frank Sinatra
노래: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