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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an 01. 2025

외출복과 잠옷의 경계

어느 여름, 뉴욕의 관광명소 타임스퀘어가 아닌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자리 잡은 편집샵에서 YMC 반바지를 산다. 나를 위한 선물이 아닌, 그를 위한 선물이다. 쇼핑을 마친 시점으로부터 뒤로 감기 버튼을 누른다. 몇 주 전 그는 날이 갈수록 더워지자 밖에 입고 다닐 반바지가 마땅한 게 없다고 툴툴댄다. 그때까지도 내가 사주는 옷을 주로 입었던 터라 이번에도 대형 쇼핑몰에 나간 김에 이 브랜드, 저 브랜드 매장을 옮겨 다닌다. 가장 만만한 곳인 자라, H&M, COS을 지나 지오다노도 들른다. 옷을 고를 땐 내 옷 고르듯 그의 취향을 십분 반영한다. 옷의 길이, 소재, 집에 있는 옷과 매치했을 때 그려지는 스타일, 주머니가 있고 없음 등 여러 요소를 떠올리며 마음에 차는 옷을 찾기 위해 요리조리 살핀다. 결국 100점 만점인 반바지는 찾지 못하고 비이커로 들어선다. 예쁜 옷은 많은데 값이 내 벌이 밖이다. 그 옆 매장인 플랫폼플레이스로 들어선다. 수입브랜드가 많고 정형화되지 않은 스타일이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어서 눈요기하기 딱 좋다. 내 것이 될 수 없음에도 기분이 한껏 올라간달까. 여기도 흠이라면 가격이지 뭐. YMC 옷이 진열된 섹션을 한참이나 서성이다 개중에 가장 무난한 청반바지가 걸린 옷걸이를 빼내어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에 대본다. '음, 괜찮네. 맘에 들어.' 반바지 치고 가격이 꽤나 나가지만 그는 옷을 한 번 입으면 오래도록 입는 타입이라 '이 정도야 낼 수 있지.' 하며 호기롭게 때 묻은 체크카드를 내민다. 그의 체격에 맞는 옷은 내게도 맞을 때가 많아서 그의 손길이 덜 가는 옷은 결국에 내 옷을 개켜둔 칸에 들어서기에 그가 안 입으면 오히려 땡큐인 마음도 가미된다.


집에 돌아와 내가 드디어 네가 입을 반바지를 사 왔다고 떵떵거린다. 내가 장시간 쇼핑한 수고를 위해서라도 얼른 입어보라고 채근한다. 그는 후들후들한 잠옷바지에서 부들부들한 새 바지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선다.


“오, 좋은데? 어디서 샀어?”


합격이다. 됐다. 그는 내가 한 요리를 먹건, 내가 고른 옷이든 입건 내비치는 반응이 꽤나 투명해서 그날도 빼꼼히 얼굴을 내밀며 반응을 살핀다. 됐네, 됐어. 환불하러 안 가도 돼서 기쁘기도 하다.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 일, 그거면 된 거 아닌가? 그야말로 잠시나마 세상 다 가진 기분이다. 이게 바로 퍼스널 쇼퍼의 마음일까?


면 자체에 진청으로 염색되어 있어서 구입한 이래로 초기에 세탁할 때는 다른 옷에 청색이 물들까 봐 따로 세탁기를 돌렸다. 처음 사 왔을 때는 쨍한 청색이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인디고 색상은 점차 옅어진다. 세탁의 달인으로서 이쯤이면 다른 옷이랑 같이 돌려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서 그때부터는 정체성이 휘발된 청반바지를 망에 넣어 세탁기에 누워있는 다른 옷에 던져두고 무심하게 세탁 버튼을 누른다..


우리가 공유한 여름이 지나가는 동안 이 반바지는 외출복이었다가 잠옷이 된다. 외출복이 잠옷이 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 반바지는 다르다. 세탁의 유무에 따라, 땀을 얼마나 많이 배출했느냐에 따라 이 옷은 외출복이었다가 잠옷이었다가, 다시 외출복이 되어 활용도가 높다. 처음에 빳빳했던 반바지는 시간의 흐름을 타며 그의 몸에 맞게 착 붙는다. 오래된 티가 나는 반바지는 정감 가는 옷이 되어간다. 청색이 바래는 동안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시간도 바래간다.


들리는 에세이: 청반바지

가수: 장기하와 얼굴들

노래: 빠지기는 빠지더라

https://youtu.be/UcpcdA4W5zc?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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