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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Dec 25. 2024

내가 해야 할 일 - 2024 크리스마스 ver.

2024년 크리스마스인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에게 우리가 만날 날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2025년까지 딱 일주일이 남았기에 내년이 꽤나 가까워져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에 겨우 힘을 주고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고심하다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카카오톡 채팅방을 연다. 우리가 헤어진 후에는 다시는 얼굴 볼 일 없을 줄 알았지만 서로에게 여전히 얽혀있는 일이 있기에 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냉정하면서도 무정하다. 그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완전한 종결을 지으려면 잔업이 마무리돼야 하기에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어유, 하기 싫어!' 말풍선을 달고 툴툴대며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하던 짤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서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다가도, 일정을 잡기 위해 그와 무미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덮어놨던 메마른 원망에 불씨가 튀어 순식간에 화르르 타오른다. 대화 말미에 나의 안부를 묻는 그의 물음에 눈물보가 터졌고 욕을 한 바가지 해주려다 마지막 남은 존엄은 지키고 싶어서 '잘 지내고 싶다.'라고 보낼까 말까 하다 전송 버튼을 누른다. '그래, 힘내자.'는 맥아리 없는 응원에 온몸에 힘이 풀리고 순식간에 악에 받친다. 인생사 통틀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준 사람이 뻔뻔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지내라.'란다. 고깝고 아니꼽고 꼴값이다.


가뜩이나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속을 뒤집어 놓으니 출퇴근길에 눈물을 매달고 다닌다. 종종 괜찮냐고 안부를 묻는 가족의 물음에도 주룩주룩 눈물로 화답할 뿐이다. 어디까지 눈물을 뽑아낼 수 있는지 매일 시험에 든다. 유튜브 재생목록에 좋아요 표시를 해둔 박지윤 노래를 한 움큼 집어 쭈르륵 튼다. 한 때 팬이어서 즐겨 부르던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때 그 시절 노래들은 꽤나 수동적인 여성의 목소리다. 사랑 타령 다 부질없다 싶다가도 1998년 발매한 <내 눈에 슬픈 비>를 들으며 속절없이 무너진다. 3분 42초 동안 최선을 다해 이 노래를 서글피 불러봐도 3분 42초 후에는 엇갈린 우리 운명은 변함이 없다. 우리의 헤어짐이 지지부진해서 이 과정이 버거워 생을 마감하고 싶다가도 '아니, 내가 왜 죽어! 정신 차려!'라는 자세로 악으로 깡으로 정신을 붙잡는다. 그와 공식적으로 이별을 판명난 지 딱 3개월 된 날이 바로 12월 25일인 오늘이다. 예수 탄생을 축복하기보다 내가 꺼지지 않고 작은 불씨를 태우며 살아있음에 축포를 터뜨린다. 그가 건네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이 참으로 아득하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3개월을 살아냈다.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긍지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설득하는 힘이 절실한 나날이 이어진다. 매년 우리의 크리스마스 루틴은 밀리언아카이브에서 커플템으로 산 크리스마스 가디건을 입은 채 기념사진을 남겼는데, 오늘은 나 혼자 방울 달린 루돌프 카디건을 입고 브런치 글을 발행한다. 아무튼, 메리 크리스마스!




들리는 에세이: 크리스마스 가디건

가수: 박지윤

노래: 내 눈에 슬픈 비

https://www.youtube.com/watch?v=kNZIGparFU0&list=RDGMEM0s70dY0AfCwh3LqQ-Bv1xg&inde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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