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가장 많이 하는 작업은 그를 도려내는 것이다. 마미손 고무장갑 한 짝을 오른손에 끼고 설거지를 하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판화구나. 내가 그를 보내는 작업이 판화와 같았다. 그가 나를 등지고 난 후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싶은 생각도 불쑥 찾아오지만 다행히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흙돌‘과 ‘생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점점 해가 늦게 뜨고 찬 바람이 어둠을 싣고 오자 억울한 마음이, 억하심정이 고개를 든다. 그가 그냥 죽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기로 다짐한 지 꽤 되는 시점이라 죽은 이의 영혼을 기리며 장례식을 치렀고, 49제도 지냈다. 향만 안 피웠지 그동안 우리의 시간에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는 과정 어드메에 있다고 생각해서 스스로에게 재차 되뇌며 믿기로 작정한 지 오랜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비누를 쥔 채 수세미에 거품을 내다가 물줄기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순간, 나는 지금 이 그릇의 기름때를 박박 닦아내는 와중에도 판화작업하듯 그를 도려내고 있다는 발상이 머리에 딱 꽂혔다.
원래 시작은 지우개였다. 잘 지워진다고 알려져 너도 나도 문방구에서 필통 속으로 들이던 말랑한 고무지우개로 그의 존재를 지우려다 오히려 그의 흔적이 너저분하게 선명해져서 지레 말끔히 지워내기를 포기한다. 괜히 지우개를 만지작거리며 지우개에게 제 기능을 못한다고 툴툴댄다. 이제는 힐난할 대상이 없으니 하다 하다 못해 지우개까지 온다. 참 못났다. 본래 지우개는 지우기를 잘해야 하는 게 지우개의 역할인데 지우고 지울수록 안 지워져서 씩씩대며 지우개 가운데부터 파내기 시작한다. 아냐, 됐다. 이 지우개로는 이 분이 풀리지 않아. 근처에 있던 검정 고무판을 꺼낸다. 탄탄하고 단단하지만 양끝을 붙잡으면 구부러지는 직사각형 고무판.
우리 둘이 하나로 움직이던 시절엔 각자의 손에 조각칼을 쥐고 나란히 공유한 시간을 틈날 때마다 새겼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검정 고무판에 조각칼을 대고 파내며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 낼 때의 쾌감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가 떠난 후 우리의 그림은 그대로 남기되 그가 있었던 자리를 왜인지 자꾸 파내고 있다. 이 고무판은 무슨 영문인지 파도 파도 개미 눈알만 한 구멍조차 생기질 않고 파면 파는 대로 끝도 없이 파진다. 고무판 주변에는 고무찌꺼기가 금방 수북이 쌓인다. 마르지 않는 샘은 들어봤어도 파고 또 파도 그대로인 고무판은 처음 본다. 분명히 고무판의 두께는 10년 전과 다름없는데 괴담 속 물건처럼 끝도 없이 파낼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들리는 에세이: 지우개
가수: 이반지하
노래: 안지워지지
https://youtu.be/RM59XU-1Nh4?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