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재래시장 한편에는 1평 남짓한 조그마한 야채가게가 있다. 이 가게에서 팔고 있는 야채 중에서 시금치는 우리 부부에게 단연 인기품이다. 나물을 해서 먹으면 시금치가 달다고 해야 더 적절한 표현일성 싶다. 옛날 어머니가 텃밭에서 뜯어다가 만들어준 시금치나물 그 맛이다. 시금치는 한단에 3천 원.
우리 부부는 시금치를 사러 그 가게에 들렀다. 어떤 할머니께서 시금치 한 단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 덤으로 1-2 뿌리 얹혀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밭에서 뜯어다가 마구잡이로 담아 논 듯한 바구니에서 2 뿌리를 훔치듯이 집어든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따라 시골 5일장을 갔을 때 많이 보았던 장면이다. 세월을 건너뛴 할머니가 생소했고 이를 지켜본 아주머니는 웃고만 서 있으니 우리 동네 골목시장에서는 아직도 서민들의 옛정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시금치 2단을 샀다. 거스름돈을 손에 쥐고서 “아주머니 행복한 하루 되셔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저는 이미 행복합니다”. 하고 인사하신다. 예상치 못한 아주머니의 인사가 뒤돌아 나오는 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저는 이미 행복합니다"? 아주머니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 세상 사는것 별것 있나요? 아픈데 없이 손수 (돈) 벌어서 세끼니 걱정 않고 남편과 알콩달콩 살면 그게 복이지요. 이런 복도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오더니 시장통 끝머리에서 두부를 팔고 있는 할머니를 가리킨다. 우리 동네에서 저 할머니를 "두부 2판 할머니"라 부른단다. 집에서 맷돌에다 콩을 갈아 밤사이에 두부 2판을 만들어 내다 팔고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반나절만에 팔고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해가 저물 때까지 앉아 계시기도 한다.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시장에 두부를 들고 나오는 시간에 맞춰 두부 2모를 사다 놓고 장사를 시작하신다. 장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 이 두부로 김치찌개를 만들어 아파트경비일을 마치고 온 남편 저녁상에 올리면 남편은 입이 헤벌레 해지면서 첫 숟가락으로 입을 다시면서 하는 말이 "재복이는 (남편) 이미 행복한 사람이야" 하신단다.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제 입에서도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 절로 나오네요".
끌쌔다. 내가 보기에는 야채가게 한다는게 만만치 않을 터인데 이리 행복해하시다니. 여름에는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하나에 의지한 채 가게를 지키시고 추울 때는 전기난로에 손을 녹여가며 한겨울을 넘길 터인데 이토록 씩씩하게 살아 가시는 아주머니.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작은 어머니께서 중화동 재래시장에서 야채가게를 하셨다. 겨울에 찾아뵐 때면 벌건 얼굴로 나를 반겨 주시곤 했다. 왜 얼굴이 왜 그토록 부어있고 벌겋게 됐냐고 물으면 동상에 걸려서 그렇단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는 이미 행복하시다니----- 부럽다.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갖은 게 없으면 어딘지 모르게 비굴해지기 쉽고 신세타령을 하기 쉬운데 이런 긍정의 힘은 어데서 나오는 것일까? 호화저택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현재 남편과 살고 있는 15평도 남 부럽지 않다고 한다.
"사람은 제 능력껏, 제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분수를 모르고 허황된, 뜬 구름이나 잡겠다고 깝죽거리다 신세 종 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인가요? 하늘이 내게 내려준 능력이 이게 전부랍니다. 그래서 남이 어떻게 살던 개의치 않아요."
나도 갖은 게 없었지만 아주머니와 같이 자존감 있게 살아보려고 애썼던 그 옛날이 있었다.
결혼후 잠시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할때는 2층 독채에서 살았다. 얼마안돼 서울로 발령을 받고서 살 곳을 알아보니 그 돈으로는 단칸방도 구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돈을 조달해 겨우겨우 단독주택에 방 한 칸을 얻었다. 일 년이 지나니 신혼에게 찾아오는 첫 아이. 비좁지만 사람 사는 곳이었다. 그러다 둘째가 태어나니 잠꼬대는 사치였다. 좌로 우로 뒤집으면 새끼들이 깔릴 판이다. 하는 수 없어 자양동에 반지하 방 두 칸으로 이사를 했다.
둘째가 태어나던 날 병원을 가봐야 했기에 상사와 동료들에게 알렸던 터라 그들은 남의 집 둘째 100일을 잊지도 않고 (특히 여직원들) 기억하여 백일잔치를 하란다. 반 지하에서 백일잔치. 와이프가
사는 게 이래가지고서야------
반 지하가 어째서?
못 사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잖아요?
돈 그까짓 것 벌면 되니까요.
젊음의 객기다. 표현을 고상하게 하자면 갖은 게 없어도 자존감 있게 살아 보려고 했던 한때다.
부장님은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셨고 강남에 살면서 외제차로 출퇴근하신 멋쟁이.
과장님은 해외지사 근무를 마쳤고 세검정 산수 좋은 단독 주택에서 사시고
대리님은 올림픽 선수촌 45평 아파트.
동료는 상계동 주공 아파트 45평. 또 다른 동료는 둔촌동 35평.
100일 잔치를 마치고 다음날 출근 하였는데 동료가 던진 한마디 "어린애들에게 공기가 안 좋겠어요".
객기와 자존감이 통째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가난을 대물림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비록 농사일을 하셨지만 부농 이셨다.
칠 남매였는데 공부 잘하는 놈은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선언하셨던 터라 아들 셋이 대학을 마쳤다.
장남인 나는 대학 다닐 적에 자취가 아닌 하숙생활까지 할 수 있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집으로 이사하던 날 나는 마음속으로 부모님께 다짐했다.
"당신들이 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둥지를(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 떠났으니 지금부터는 저의 몫 입니다."
그런 연유로 서울에서 반 지하까지 내려와 자존감 있게 살아 보려고 했지만 동료의 한마디에 쉽게 무너져버린 나. 갖은 게 없는 가난을 극복하고 살 수 있다는 게 아무나 가 아니다. 오늘 야채가게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자존감은 어데서 나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