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면서 영어를 잘하면 남들이 부러워한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한인 2세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칭찬을 한다. 우리는 그들을 바이링구얼(bilingual)이라 부른다. 우리 아들들도 한국말과 영어를 잘하니 바이링구얼 이라고 칭찬해주고 싶다. 특별한 교육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그들에게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상사 주재원으로 미국에 와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애들은 그때 초등학교 1.2 학년이었기에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기에 매우 시기적절했기 때문이다. 지금같이 유치원 때부터 영어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어 말 그대로 ABC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학교에 입학을 한 것이다. 둘째 아이를 학교 교실에 들여보내려고 등을 떠밀어 넣으니 문 앞에서 버티며 "시커먼 흑인 애들과 파란 눈의 백인 애들이 무섭다"고 울던 게 엊그제였던 것처럼 기억이 너무도 새록새록하다.
사람도, 환경도, 언어도 다 생소하고 낯설기만 한 학교에서 하루 종일 교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 애들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1리터 물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학교수업이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도 모르고 쪼그리고 있다 급우들이 책가방을 들고 집으로 가면 수업이 끝난 줄 알고 덩달아 집을 찾아오는 우리 애들은 아마도 눈치로 때려잡는 실력이 이때에 크게 늘었지 않나 싶다. 며칠이 지나니까 친구에게 처음으로 "하이"하고 인사를 했다고 입을 땐 다. 학교와 학부모간의 유일한 소통은 선생님이 간단하게 써준 메모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 메모는 짧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용기와 기쁨을 줬다.
"오늘은 제임스가 친구들과 운동을 같이 했어요
오늘은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함께 어울렸어요"
우리는 누가 누구를 이끌어 주고 돌봐줄 겨를이 없어 각자도생 해야만 했다. 나는 직장에서 새로운 업무파악에, 익숙지 못한 영어로 나를 보조해 주는 미국 여직원과 소통문제로 나름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애들이 하루라도 빨리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도록 영문학을 전공한 아빠가 틈틈이 영어라도 가르쳐 줄 수 있으련만 나는 그럴 여유도 없었고 또한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집에서 어설픈 영어발음으로 애들을 가르친다고 하다가 행여 발음이라도 망가뜨리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애들을 학교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내가 애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스트레스를 풀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애들을 데리고 왔으니 영어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잘할 거라고 믿었다.
미국은 우리 애들처럼 영어가 전혀 안 되는 이민자들을 위해 학교 내에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class를 운영하고 있다. 정규수업 중 일부를 할애하여 영어 기초교육을 별도로 시킨다. 학생의 영어습득 능력에 따라 빠르면 6개월 길게는 2년 정도 교육을 시키고 나서 이제 됐다 싶으면 ESL을 끝내고 정규 수업으로 투입된다.
우리 애들의 영어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향상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랬다. 아니 부러웠다. 그들과 집에서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내 영어를 향상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유혹을 많이 느꼈으나 나는 이를 결단코 자제했다. 왜냐면 애들은 영어습득이 빠른 만큼 한국말을 쉽게 잊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집안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영어를 안 쓰기로 우리 부부는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애들을 바이링구얼로 만들 수 있는 첫 단추가 됐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재미교포 자녀들 가운데에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이민 2세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애들의 부모는 대체로 영어가 출중한 편이다. 아마도 애들을 상대로 대화하면서 내 영어를 향상해 볼 요령으로 집에서 영어로 소통하고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언어는 하나를 습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학교 교육학 과정에서 어느 교수님이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애들의 언어습득 능력은 무한대(unlimited)라고 했던 말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다.
이제는 애들이 성장하여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어쩌다 직장에서 부모와 통화를 해야 할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도 사무실에서 한국어로 말하는 것을 볼 때면 그들이 자기 뿌리에 대해서 자긍심을 갖고 있지는 않나 착각도 해본다. 주위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다.
어쩌면 애들이 한국말을 이토록 잘해요?
어머 좋겠네요! 애들이 한국말을 잘해서-----
그러나 살다 보니 나의 자식 자랑도 여기까지였다. 어느 날 첫째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한국계 이민 2세의 여자를 둘째는 파란 눈의 여자를 데리고 와서 우리 결혼하겠다고 통보할 때에는 "좋고 싫고를 떠나서 당혹, 당황 그 자체였다".
혼기가 다된 자식들을 처다 보면서 며느리가 새 식구로 들어오면 나는;
"식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며느리를 데리고 나가 멋진 선물도 사주고 싶었고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아름다운 데이트도 꿈꿨고
식구들이 모이면 웃음꽃이 피도록 분위기 메이커가 되겠다"
고 다짐을 했건만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환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파란 눈의 며느리가 우리 집을 찾는 첫날 새 식구를 맞이하는 설레임 보다는
"영어에 더 신경이 쓰이고
아들 체면을 구기지 않는 폼나는 부모가 되려고 애쓰고
며느리 집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집안 이라는 것을 보여주고만 싶었다"
결혼 당사자들은 상대의 집안이나 부모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왠지 신경이 쓰인다. 이게 선진국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아직도 한국적인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설레임과 반가움과는 괴리가 있는 만남이었다.
가족들 대화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며느리에 대해서 괜스레 내가 미안해하면 아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글쎄다. 이것이 내가 기대했던 가족 모임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식구들끼리 대화 중에 며느리 이름이 언급되면 그녀는 마치 들판에서 풀을 뜯다 놀란 사슴처럼 파란 눈을 번뜩 이면서 아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곤 한다. 이제는 그녀를 신경 쓰이게 할까봐 우리들만이 대화 할때는 나름 조심도 해준다. April 이라는 이름 대신 "윌리암 엄마"로.
식탁에서도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도 시작됐다. 모든 식구들이 그녀의 젓가락이 어디로 가는지 주시하고 있다. 그러다 그녀가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있어 만지작 거리면 그녀가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식재료가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물으면 우리는 짧은 영어로 설명이 충분치 못하여 와이프가 먼저 한국말로 아들에게 설명해준다. 그러면 아들은 이를 곧장 그녀에게 영어로 설명해주는 통역관이 되곤 한다. 통역관을 대동하고 식사하는 우리네 식탁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침 운동을 하러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며느리와 마주쳤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커피숍에 간다면서 같이 가잔다. 처음으로 단 둘이서 길거리를 걷는 시아버지와 파란 눈의 며느리 모습은 누가 봐도 멋쩍어 보이기만 한다. 180 센티미터 훤칠한 키의 서양여자 옆에 늙으스레한 168센티미터의 동양 시아버지 모습은 누가 봐도 어울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커피숍에 들어서자 무엇을 마시고 싶냐고 묻기에 "너 먼저 시켜라" 했더니 듣도 보도 못했던 커피 주문이다.
"XXX향의 거피에다 설탕 15%, 크림 10%"
아! 이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호식품이라는 것이구나
“나 만의 향으로 내 취향으로 만들어 마시는 커피“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을 보면 "대충 마시지 뭐가 그렇게 까다로워? 참으로 커피마저 유별나게 마시네" 하며 비웃기라도 한다. 우리는 그녀와는 다르게 매우 간단하다
"아메리카노, 아니면 카푸치노"
그녀가 주문을 마치고 나는 무엇을 마시고 싶냐고 묻기에 나만의 독특한 커피가 없어 마음에 내키지 않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
"나는 아침 일찍 모닝커피를 마셨으니 보바(boba)를 먹고 싶다" 했다.
이렇듯 결이 너무 달라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살 줄 만 알았는데 그녀는 우리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은 식구들과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하는 날이다. 저녁에 앞서 오리지널 우리 가족 그러니까 두 아들과 와이프 그리고 나 넷이서 골프를 치고 골프가 끝나는 즉시 각자 집으로 가서 와이프를 데리고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파란 눈의 며느리가 나타나지 않고 아들 혼자서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삐져서 저녁을 함께하고 싶지 않다"고 했단다. 간밤에 며느리가 마트에 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렸단다. 그런데 아들 녀석이 이 늦은 밤에 마트를 왜 가느냐고 말렸는데도 가더니만 결국 지갑을 잃어버렸으니 왜 내 말을 안 듣느냐고 짜증을 냈던 모양이다. 이게 서운 했는지 지갑을 잃어버린 것 자체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 모임인데 웬만하면 자기감정을 자제하고 가족모임에 동참했으면 하는데 식당에 나타나지 않는 며느리를 보고서 "역시 서양 며느리라 다르구나.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감정대로 사는 그들"이라고 딱지를 붙여 버렸다.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째 아들집에 부부싸움이 궁금하여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집에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 애 윌리암을 데리고 커피숍에 나와 있다 한다. 전화를 끊고 나니 와이프 전화기에 문자 메시지가 뜬다. 파란 눈의 며느리 다
"Umma, can you stop by my house? I miss you.
엄마 우리 집에 들렀다 가면 안 돼? 엄마가 보고 싶어"
순간 미묘한 감정이 나를 두들겼다. 어머니가 아니고 엄마? 파란 눈의 며느리는 이미 엄마가 어떤 뉘앙스인 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괴롭거나 위로를 받고 싶으면 얼굴을 파묻을 수 있는 포근한 곳이 엄마의 가슴이라는 것을.
우리는 집으로 가던 길을 돌려 아들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예전처럼 우리를 허그하면서 반긴다. 우리는 무슨 연유로 싸웠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엄마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으니까.
"you are my daughter, not a daughter-in-law. James makes you angry, let me know. I wil call him and let him back home right away
너는 우리 집 며느리가 아니고 우리 딸이야. 혹시 너네 남편이 화나게 만들면 나한테 다 일러라.
전화해서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마"
이번에도 골프 얘기다. 둘째 아들, 와이프, 나 셋이서 골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골프클럽을 차에서 내리다 말고 현기증이 있어 와이프를 불렀는데 그 이후로는 정신을 잃어 기억이 없다. 깨어나 보니 병원 응급실에 누워있는 것이다. 탈수현상으로 맛이 가버렸단다. 기력을 회복하고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파란 눈의 며느리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면서
"아버지 때문에 내가 죽는 줄 알았어요. 이제부터는 아버지를 내가 관리해야겠어요"
의식을 잃었을 때의 상황을 와이프가 일러준다.
"당신이 쓰러 지니까 며느리 April 이 곁에서 엉엉 울면서 난리였어요
부엌을 드나들면서 찬물수건을 만들어 가져오기도 하고, 이럴 때 혀를 깨물면 혀가 잘릴 수도 있다면서 우리더러 입을 벌리라고 하더니 나무조각을 입에다 물리더라고요. 그런 것은 어데서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며칠 후에 파라 눈의 며느리는 1.5리터 물통을 사 와서 내게 건네주면서 오전에 한병, 오후에 한 병씩 마셔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이다. 어쩌다 직장에서 바빠 물 마시는 것을 소홀히 하고 물병에 물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면 다시금 그 커다란 파란 눈을 부릅뜨고서는 "아버지 물을 덜 마셨군요. 문제가 많아요. 왜 내 말을 안 듣지요?" 그녀의 아들 윌리암을 불러 "윌리암, 하비가 물을 안 마셔" 하고 일러 버린다. 거기서 끝이었으면 좋겠다. 다시금 그녀의 남편을 부르더니 "여보야 아버지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이것 좀 봐 물을 덜 마시고 오셨잟아"
우리 집에 찾아온 서양 여자 앞에서 서투른 영어로 당황해하고 행여 부모님 때문에 아들 체면이라도 구길까 봐 전전긍긍했던 게 엊그제였는데 벌써 정이 들어
우리는 파란 눈의 며느리를 딸이라 부르고
그녀는 비실비실한 시아버지를 자기가 관리하겠다고
하니 이게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